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 나희덕,「부패의 힘」
모든 것들은 조용히 낡아갑니다. 시간이 존재의 피부 속으로 침투할 때, 모든 존재는 제 윤곽을 허뭅니다.
빗물에 철대문이 붉은 녹물을 흘리며 낡아가고, 알함브라 궁전의 광휘도 조금씩 빛을 잃어갑니다.
누렇게 탈색되는 한 장의 흑백 사진 속에서의
추억은 속수무책으로 그 푸르름을 잃어갑니다. 새벽이 오면 별들은 '알수없는 모래성'으로 자리를 옮기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도 조금씩 그 열기를 잃어 갑니다. 모래톱 속에 물이 빠지듯 사물들은 조금씩 제 형체와
윤곽을 허뭅니다. 시간은 결코 그 속도를 늦춰주는 법이 없습니다. 거울을 보며 안절부절 아이 크림을 발라 보기도
하지만 시간은 결코 비껴가는 법이 없습니다.
시간과의 게임은 필경 패배가 예정된 게임
청춘을 잃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기사 백발과 구부러진 허리를 기꺼워 할 사람은 없죠.
주름살이 패이고 흰머리가 는다는 것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심리적 체험이겠죠. 그러나 새치와 주름살에 호들갑
스럽게 반응하는 것도 그다지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닙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만이 가지는 건강과 탄력이
있겠지만 낡은 것은 낡은 것만이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뻔지르르한 합성수지 가구에서 느끼지 못하는
고전적 분위기를 구입하기 위해 황학동 벼룩시장을 헤매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싱그러움과 탄력을 잃은 대신 어떤 이는 그윽하고 깊은 눈길을 얻기도 하더군요 싱그러움과 탄력은
그저 얻어지는 것일지 몰라도 그윽한 눈길은 그저 얻어지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시간의 퇴적층에 묻힌 많은 상처와 아픔들을 통과해낸 자의 '그윽한 눈길'은 그 어떤 발랄함과 삽상함과도 견주어도
기울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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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황새기젓 같은 꽃을 다오
곤쟁이젓 같은,꼴뚜기젓같은
사랑을 다오
젊음은 필요 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 윤후명,「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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