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tc,

이중섭

by 류.. 2005. 3. 10.

 

 

이중섭[李仲燮 , 1916,3,10~1956,9,6]

이중섭의 특징(기법/ 분위기)

"가족과 민족에 대한 사랑 화폭에 담기위해 그는 자신을 버렸다.

 

일제 치하와 6.25라는 우리 역사의 가장 큰 아픔 속에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살랐던 화가 이중섭. 그는 유희와 낭만의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고집하던 어떤 화가들과는 달랐습니다. 시대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었고, 민족의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양심이 있었으며, 함께 아파하는 가슴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예술의 혼으로, 역사의 한복판에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민족의 비극을 감당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평안남도의 한 지주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난 이중섭은 5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라 할 수 있는 평양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림그리기에 상당한 소질을 보이기 시작하였죠.

그 후 이중섭이 다녔던 오산고등보통학교는 당시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 선생이 설립한 학교였습니다. 그러한 민족주의적 교육환경 덕분에 이중섭은 애국심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시작했죠. 한글을 없애려고 하는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고자 그는 한글의 자모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 일본 유학시절에서도 그의 서명은 한글이 되었죠.

그 학교에는 유학까지 다녀온 화가 임용련이 미술교사로 있었는 데요, 이중섭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소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 데요. 그의 학창 시절 많은 날을 들판에 나가 소를 관찰하는 데 보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이중섭을 “소에 미친 놈” 이라 했다고 하네요. 이중섭의 소질을 인정한 임용련은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며 일본유학을 권유하였고, 그는 스승의 말에 따라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민족적 정서를 가지고 있던 이중섭은 서양 미술의 화풍에 젖어있던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적응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동경문화학원으로 학적을 옮겼죠. 그 곳에서 이중섭은 착하고, 따뜻한 여인이며 훗날의 아내가 되는 마사코를 만나게 됩니다. 마사코와 귀국하여 원산에 정착한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봉직하기도 하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46년 디프테리아라는 병으로 첫 아들을 잃고, 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그의 인생은 참담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중섭의 집은 비행기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고,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피붙이 하나 없는 그 곳에서 그는 부두의 막노동자, 운수회사의 인부노릇 등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폐결핵에 영양실조까지 걸리게 되고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게 되죠.

아내와 두 아이를 보내고 난 이중섭은 전국을 떠돌며 방랑 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중 1955년에 처음으로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시회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거식증에 걸리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 빛을 발하듯 손톱과 송곳으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죠. 그렇게 만든 작품은 뉴욕에 있는 모던 아트 뮤지엄에 소장되었습니다.

이중섭 만이 그릴 수 있었던 조선의 소와 닭 그리고 아이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그를 가장 위대한 한국의 민족화가로 칭송받게 하였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가족을 그리워하며 선과 면을 만들던 이중섭은 1956년, 가을에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병원의 침상에서 마지막의 긴 호흡을 합니다.

소의 말 – 이중섭

맑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 이제 여기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픈 것
아름답도다 / 두 눈 맑게 뜨고 가슴 환히 헤치다.

 

 

 

[ 망월 (1940) ]
달을 보라고 외치며 잠자는 사람을 깨우려는 새는 무엇을 의미할까? 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가에 한 여인이 염소에 기대에 누워있고, 새 들 중 한 마리가 오른 쪽에 있는 달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네요. 이 여인을 깨우려는 것 같죠? 동경 유학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일본인화가들이 창립한 단체의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입니다. 당시 이중섭은 일본에서 활발한 작품 및 전시 활동을 보였습니다.

 

 

[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1951) ]
피난 중에 잠시 머물렀던 제주도 서귀포에서의 풍경을 화폭에 담은 것입니다. 매우 적막하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며, 그의 여느 그림과는 사뭇 필치나 화법이 다릅니다. 아마도 아내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러 나가고, 그는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기에, 여러 화법들을 시험해 보면서도 편치 않은 작가의 마음이 색조와 필치로 나타난 듯 합니다.

 

 

 

 

[ 두 어린이와 복숭아 (1953) ]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첫 아들이 죽자, 이중섭은 아이의 관 속에 혼자서는 외로울 테니 이거라도 가지고 놀라며 천도복숭아가 그려진 몇 장의 그림을 넣어주었다고 해요. 이중섭은 아들이 자신이 넣어준 복숭아 그림을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리면서 이 그림을 그린 듯 합니다. 복숭아는 극락의 열매라고도 하죠.

 

 

[ 달밤 (1953) ]
구름에 쌓인 달을 발가벗은 한 아이가 누워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위에 그려진 달과 구름은 전통적인 소재이면서도 그 표현 또한 전통적인 문양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중섭 특유의 넉넉한 미소의 아이가 달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습니다.

 

 

[ 물고기와 노는 두 아이 (1953) ]
아이들과 아내를 일본에 보내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중섭은 아이들의 그림을 가장 많이 그렸습니다. 새나 동물 등 자연과 동화되어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그것은 아버지로서의 자녀들에 대한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듯 그는 결코 화려하거나 허망한 꿈을 꾸지 않았는 데, 끝내 그 꿈을 볼 수 없었다는 게 너무나 가슴 아프네요.

 

 

[ 달과 까마귀 (1954) ]
이중섭은 까마귀를 반가운 존재로 그렸습니다. 달을 배경으로 모여드는 까마귀들은 서로를 반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아껴주는 모습들이죠. 이런 가족과도 같은 모습은 그가 바라는 꿈이었습니다. 이런 까마귀들처럼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던 거죠. 그 바람을 깔끔하게 그려내었습니다.

 

 

 

[ 황소 (1954) ]
대표작인 소들에 대한 그림을 그리던 이 시기에 이중섭은 경남 통영에서 작품 제작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가 그의 예술적 역량이 총결집되는 때입니다. 맑은 눈의 잘생기 소를 보면서 그는 많은 습작을 했고, 조선 땅 특유의 소를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를 했죠. 힘찬 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그림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기상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흰소 (1954) ]
그가 청소년 시절부터 관찰하였던 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생명력이 넘치고 강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소를 그려내었습니다. 거친 콧김이라도 뿜는 듯한 소의 콧잔등에서 힘있게 쭉 뻗은 꼬리의 끝까지, 그리고 당당하게 선 네 발과 근육의 표현까지 흰 선과 검은 선의 필치는 강한 바람처럼 화폭에 가득 넘치고 있습니다. 정말 그는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조선의 제일가는 소를 그려내었습니다.

 

 

[ 가족 (1954) ]
전해오는 얘기로는 종이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 선화를 그려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뜻밖에 새로운 표현방법을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는 후에 은박지를 이용하여 대작을 그릴 것이니,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하네요. 가난과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 자화상 (1955) ]
6.25 남북 전쟁 직후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평양이 고향이며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이중섭을 간첩, 공산당 내지는 정신 이상자로 몰았습니다. 단지 병을 앓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죠. 그는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정신이상자는 자화상을 이렇게 정확히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한 달이나 수용되어야 했습니다.

 

이밖에 그림들.

다섯 아이와 끈

 

말 탄 남자를 뿔로 쳐내는 소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물놀이 하는 아이들

 

바닷가의 아이들

 

봄의 어린이

 

연꽃밭의 새와 소년

 

연꽃밭의 새와 소년

 

<작품 추가. 2004.12.18>

묶인 새 종이에 연필

 

흰 소 1953s 종이에 유채 34.5X53.5cm

 

활을 쏘는 사람들, 1941, 종이에 펜과 수채

 

소년, 1942-45, 종이에 연필

 

세사람, 1942-45, 종이에 연필

 

낙원의 가족, 연도 미상, 은박지

 

게와 물고기가 있는 가족, 연도미상, 은박지

 

부부, 연도미상, 종이에 수채와 그레파스

 

부부, 1954s, 종이에 유채

 

부인에게 보낸 편지, 연도미상,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연도미상,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Jan Saudek  (0) 2005.05.21
귀가  (0) 2005.04.21
Zdzislaw Beksinski  (0) 2005.02.18
단순한 기쁨  (0) 2005.01.02
재미로 보는 혈액형...  (0) 2004.12.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