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우리 생활 주변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들이 많다. 살다 보면 사라져 가는 것들이
불쑥 애틋하게 눈에 밟혀 오는 때가 있다. 그중 생각나는 목록 몇 가지를 순서 없이 떠올려 본다. 골목길, 공중전화,
이발소, 정미소 등등. 한때 요긴했으나 지금은 기억에서 멀어진 생활의 세목들이 새록새록 눈에 밟혀 온다.
미로처럼 어지러운 좁은 골목길은 생활에 다소 불편을 초래했지만 얼마나 많은 인정을 꽃을 피웠던가. 키 작은 처마
와 처마가 연달아 맞닿아 있어 한낮에도 짙게 그늘이 고여 있던 질척한 골목길. 이쪽 집 창문을 열고 저쪽 집 열린 창
문을 향해 갓 쪄낸 고구마나 옥수수, 밀개떡 등을 건네기도 하고, 송이눈이 내리는 겨울밤 술 취한 홀아비의 코 고는
소리가 낮은 블록 담을 넘어가 낯가림 없이 과부댁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고 가는 비 오는 어느 여름날 저녁 이웃집
고등어구이 냄새가 배고픈 남매의 공복 위로 스멀스멀 기어오르기도 했던 골목길. 늦은 저녁 나이 어린 누이와 함께
집앞에 쭈그려 앉은 채 저쪽 끝에서 빈 도시락 주머니를 흔들며 돌아올 어머니를 기다리던 골목길. 새벽마다 두부장수
방울소리가 창문을 흔들고, 조간을 돌리는 고학생의 성급한 발자국 소리가 아침잠을 깨워 흔들어 대던 골목길. 백내장
앓아 대던 가등 아래 서로 더운 숨을 탐하던 늦은 밤의 연인들 실루엣이며, 이집 저집에서 흘러나온, 온갖 소리의 넝쿨
들과 온갖 색깔 범벅의 냄새들이 주인 몰래 저희끼리 희희낙락 짝짓기하던 우리 한때의 자궁이었던 그곳, 그 골목길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없다.
모던의 상징이었던 공중전화. 뜨겁고 짜고 싱겁고 차갑던 사연들을 분주히 실어 날았던 공중전화.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뜻 모를 그리움이 까닭 없이 마음의 우물에 가득 차 출렁이던 공중전화.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 저녁 길게
늘어선 줄이 빨리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언 발을 동동 구르면서 차갑게 식은 청색의 손을 호호 불어 대던 추억의 공중전화
한 시절 시쳇말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잘나가던 모던 보이, 모던걸들이 이제 늙은 창부처럼 누군가 덜커덕
떨어뜨린 마음 한조각을 허겁지겁 삼키고 있는 공중전화가 우리시대 낡은 서정시같이 잘 보이지 않거나 후미진 곳에 함부
로 방치돼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삶’이 무채색 벽면에 걸려있던
천장 낮은 이발소. 장 프랑수아 밀레의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만종’이 걸려 있던, 금성 라디오에서 구성진
유행가 가락이 흘러나오던, 국수 내기장기 놀이가 자주 벌어지던, 늘 서울이 그리운 늙다리 총각들이 무나 참외를 깎아
먹으며 음담패설을 주고받던,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운 장삼이사들이 모여 앉아 가뭄 얘기,조합 빚 얘기, 자꾸만 그리운
서울 얘기 등으로 까닭 없이 흥미진진하던 곳, 정겨운 이발소가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눈에 띌 뿐 멸종 신세로 전락해
가고 있다.
어찌 이뿐이랴. 정미소, 떡방앗간, 하꼬방, 연탄구이 집, 지하다방, 작부 집 등속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의 목록
들이 이름만 남긴 채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다. 시편 ‘옥상이 논다’는 이제 이곳 현실 속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지난 연대의 살가운 풍경이다.
다 해진 런닝구를 입고 염장을 지르던 이웃 아저씨가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여름날이다.
이재무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 천양희,사라진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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