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자신의 존재 양식을 선택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존재로 재생하기를 원할 것인가?
나는 어떤가? 나는 바위나 돌과 같이 비생명체, 즉 그냥 물질이나 물고기나 새, 동물보다는 풀과 나무와 같이
식물체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한 비생명체가 에메랄드나 다이아몬드 건, 나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죽어 있음보다는
살아 있음이 아름답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는 존재가 인간들에 의해서 아무리 높이 평가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동물보다는 식물로 존재하고 싶다.
바위도 좋고, 풀도 좋고, 물고기도 좋고, 날짐승도 좋고, 네 발 달린 야수들도 좋지만, 나는 역시 나무를 더 좋아한다.
동물보다 나무를 더 좋아하는 것은 동물들이 한편으로 풀이나 나뭇잎과 같은 식물들 혹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피해서 항상 사방을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돌아보면서 도망쳐 다녀야 하는
모습이 체통이 없고 불안정하며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식물, 모든 나무가 한결같이 내가 살고 싶은 존재 양식은 아니다.
내 마음을 가장 끄는 나무는 곡선을 그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겨울에도 푸르게 우뚝 서 있는 한국 고유의 높으면서도
우아한 적송(赤松)이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동안 변하지 않는 푸른 잎을 간직하고, 폭풍이 불든 폭우 폭설이 덮치든
흔들리지 않고 동네 한가운데나 혹은 산기슭에 하늘을 향해서 높이 뻗어 있는 전나무(杉木)가 모두 보기에 좋다. 하지만
나는 적송보다는 전나무가, 적송의 존재 방식보다 전나무의 존재 방식에 더 마음이 끌린다.
언제고 변함없이 푸르고, 어떠한 계절의 요란스러운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떠들썩하고 부산스럽게 돌아가는
인간사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에 딱 버티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서 마을에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묵은
전나무의 자신감과 지조가 한없이 믿음직하다. 하늘로 곧장 높이 뻗어 뛰어나 보이면서도 단순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디
한 곳에서도 흩어짐 없이 잘 균형잡힌 동네 한복판에 선 전나무의 자세는 황제와 같은 권위로 아주 당당하면서도 극히
겸손하고, 점잖으면서도 고귀한 품위를 갖추고 있다.
인간의 삶이 그 하루 하루가, 아니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자유와 그것이 동반하는 불안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의식
하면 할수록 나는 살아 있으면서 모든 정신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초연하게 존재하는 전나무 같은 인간으
로서 존재하고 싶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외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성찰해 보면 볼수록 그것은 당당하지도, 아름답지도,
자유롭지도, 건강하지도 그리고 의젓하지도 못하다.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사정은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이런 것을 의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나는 전나무, 말 없이 우뚝 선 푸른 전나무 같은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
♬ Katherine Jenkins - Pachelbel's Ca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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