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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무렵

by 류.. 2008. 4. 1.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 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애와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 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살 열 몇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일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 안도현 시 '저물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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