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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집

추억으로 가는 술집기행

by 류.. 2007. 3. 27.

 

 

추억으로 가는 술집기행



동학사


정성균 시인, 광천식당의 두부두루치기, 청주해장국집의 올갱이국
 


마이산청정막걸리집의 막걸리와 안주, 황의상 선생, 삼백집의 콩나물국


뜨락집의 통술, 이달균 시인, 충무식당의 복국


저도 연륙교
춘색에 겨워, 추억에 젖어

봄기운이 완연해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꽃소식이 들려오면서, 겨우내 위축되었던 몸은 한껏 기지개를 켜고, 마음 또한 들뜨게 마련이다. 자연의 섭리가 그러하니 탓할 일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몸과 마음의 변화에 맞추어 적당한 여흥을 즐겨보는 것이 생활의 활력을 위해 좋을 듯하다. 묵은 피로를 풀고 생활의 활기를 되찾는 데에 여행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터인데, 여행과 함께 여흥을 즐기는 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다. 과음만 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분위기를 돋우면서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어 굳이 피할 일만은 아니리라. 지역적으로 특색이 있으면서 서민적인 술집 몇 곳을 소개한다. 마침 술자리에는 재향인사로서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소위 ‘70·80세대’ 세 사람이 기꺼이 동석해 주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현역 시인이고, 나머지 한 사람 역시 학창시절 동인활동을 했던 터라 자리는 시심으로 정겹기만 했다.

중부권 대전 두부두루치기집

대전하면 흔히 먼저 떠올리는 게 ‘가락국수’다.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라는 노래가 상징하듯 대전은 1905년 ‘경부선’이라는 철도가 가로질러가면서 급작스레 도시가 된 곳이다.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고, 이어 경부와 호남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대전은 그야말로 잘나가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이제 대전은 행정과 과학의 중심이라는 새로운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가면서 가일층 발전의 길을 걷고 있지만, 신흥도시라는 내력 탓에 고유의 특색 있는 음식문화를 이루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심지어 ‘삼탕의 도시’라는 말까지 있는데, ‘삼탕’이란 ‘유성온천의 온천탕, 한밭식당의 설렁탕, 객지의 피로를 풀기 위한 다방의 쌍화탕’을 이르는 말이다. 그만큼 깊은 내력을 지닌 독특한 음식문화가 없다는 말이겠다.

대전역 플랫폼에서 말아주던 가락국수가 이 지방의 명물이 된 것처럼, 아주 서민적인 음식으로서 이 지역의 대표음식 격에 오른 것이 있다. 두부두루치기라는 것인데, 돼지고기나 오징어두루치기와는 달리 비교적 값이 싼 두부를 매운 양념으로 데친 음식이다. 술안주로도 손색이 없지만 면사리나 공기밥을 넣고 비벼먹으면 그대로 끼니를 대신할 수도 있어서, 주머니사정이 여의치 않은 서민들이나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두부의 영양가야 이를 필요도 없고, 톡 쏘는 매운맛이 소주와 조화를 이뤄 특히 소주 안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값도 두부두루치기 한 접시에 5000원, 면사리 1인분에 1000원으로 저렴해,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시내 대전여중 뒤 골목길에 있는 진로집, 선화동 음식특화거리 안에 있는 광천식당 등이 두부두루치기집으로 유명하다.

   진로집 


진로집(042-226-0914)에서 만난 정성균 시인은 대뜸 방황하던 청춘의 아픈 기억을 꺼내들었다.

“제 고향이 금산인데, 가난한 종가집의 종손으로 태어난 탓에 젊어서부터 고생이 심했지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밑으로 떠맡아야 할 동생은 줄줄이고, 뜻대로 되는 일을 없고…. 아마 지금까지 직장을 옮긴 것만 해도 넉넉히 마흔 번은 넘을 것 같은데, 80년대 초반인가, 그때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낮부터 진로집 연탄구덕을 끼고 앉아 두부두루치기 한 접시에 소주를 들이붓기 시작했지요. 밖에는 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그러다 괜스레 울컥해지면서 갑자기 고향에 있는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사실은 어릴 때부터 은근히 좋아하던 이웃집 누나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데 너무 취한 탓에 집을 잘못 찾아들어 그만 그 집 개에게 엉덩이를 물리고 말았습니다. 다 큰 놈이 할머니 품에 안겨 울다가, 괜히 헛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것은 끊임없이 떠돌 수밖에 없었던 동시대 젊음의 초상이기도 했고, 어쩌면 ‘머무는 도시’가 아니라, ‘거쳐가는 도시’로 여겨졌던 대전이 낳은 풍경이기도 했으리라. 그 안에 칼칼하기만 한 두부두루치기의 매운 맛과 소주의 독기가 있었고…. 적당히 취기가 오른 시인은 자리를 옮겨 노래방으로 가자고 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술만 취하면 몇 시간이고 노래를 부른다는 핑계와 함께. 그러나 속셈은 딴 데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래방에 간 시인은 자신의 시에 곡을 붙인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를 반주도 없이 몇 번이고 불렀다.

소낙비는 내리구요/허리띠는 풀렸구요/업은애기 보채구요/광우리는 이었구요/소코팽이 놓치구요/논에둑은 터지구요/치마폭은 밟히구요/시어머니 부르구요/똥오줌은 마렵구요/사람환장 하겄네요

- 정성균 ‘어떤 날’


이왕 술을 먹여드렸으니까 속풀이까지 해드려야겠는데, 충청도에서 해장국으로 유명한 것이 올갱이국이다. 올갱이는 전라도에서는 대사리, 강원도에서는 꼴부리, 경상도에서는 고둥으로 불리는 다슬기의 충청도 사투리다. 민물에 사는 작은 소라 모양의 올갱이는 살을 씹으면 쌉쓰레 하면서도 향이 나고 뒷맛이 개운하며, 소화가 잘되고 뱃속을 편안하게 해주어 술꾼들의 해장국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동의보감에도 다슬기의 효능에 대해 ‘성질은 서늘하고 맛은 달며 독은 없다. 간장과 신장에 작용하여 갈증을 그치게 하고, 뱃속의 창을 치료하며, 간의 열과 염증, 눈의 충혈과 통증을 다스리고, 대소변을 잘 나가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는 옥천을 비롯한 충북지역에 발달한 음식인데, 대전지역에도 청주해장국집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올갱이해장국을 팔고 있다. 대전지역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유성온천이 있고, 동학사를 비롯한 계룡산 일원은 봄꽃으로 유명하다.

호남권 전주 막걸리집

대전과는 달리 전주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도시로, 그만큼 비빔밥을 비롯한 전통음식도 뛰어난 곳이다. 또한 풍류와 예술의 고장이었던 만큼 술문화도 잘 발달되어 이강주 같은 좋은 술을 빚어내기도 했다. 반면에 대전이 신흥도시로서 괄목할 만한 발전상을 보이고 있는데 비해, 전주는 어쩌면 전통을 무겁게 머리에 이고 질식할 것 같은 고루함에 눌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개발이 만능이 아니고, 오히려 전통문화의 가치를 살려나가는 것이 좋다고들 하지만, 예를 들어 비빔밥이 세계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산인 전주에는 그다지 큰 이익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처럼, 개발도 전통의 고수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오늘의 전주가 아닌가 하여, 전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 소개하려는 전주의 막걸리집들 역시 그 풍성함 뒤에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어 마음 한켠이 무겁기도 하다.

막걸리야 두 말할 나위 없이 전통적인 서민주이고, 전주의 한정식문화가 반찬 가짓수가 많고 풍성하기로 유명하지만, 전주 막걸리집에서 나오는 술상을 받아보면 놀라움을 넘어서 의아할 정도이다. 기본으로 나오는 막걸리 한 동이 또는 한 주전자에는 보통 시판되고 있는 막걸리 세 통이 들어간다는데, 현재 그 막걸리 한 통 가격이 술집에서 3000원 정도이고, 전주 막걸리집에서는 한 동이 또는 한 주전자에 1만 원을 받고 있다. 거기에 여기에 여나무 가지가 넘는 안주가 따라나오는데, 안주값은 따로 받지 않는다. 거기다 술이 추가될 경우 새로운 안주들로 교체해 준다. 이쯤 되면 아무리 지정된 양조장에서 싼값에 막걸리를 들여오고, 주변지역의 산물이 풍부하다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격인데, 그 이면에는 사정이 있었다.

도시의 개발이 늦은 전주에서는 그만큼 일자리가 많지 않아 인건비가 싸다는 것이고, 자연 경기도 좋지 않아 손님만 든다 싶으면 너도나도 따라 똑같은 가게를 내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막걸리집만 해도 7, 80년대까지 번성을 누리다가 어느 정도 살만 하게 되면서 사라졌던 것이,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하나둘 다시 생겨나더니. 지금은 아예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나 밀집된 막걸리거리만 해도 서너 곳이 넘는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오는 손님 수도 줄고, 그런 만큼 다시 한정된 손님을 놓고 서비스 경쟁을 벌이다보니 더욱 수지는 악화된다. 그래서 최근에는 많은 집들이 안주의 질은 높이는 대신, 기본 1만5000원에 한 주전자가 추가될 때마다 1만 원씩 더 받고 있기도 하다. 일종의 자릿세인 셈이다.

이야기가 너무 어두운 곳으로 흘러간 것 같은데, 어쨌든 전주 막걸리집을 찾는 외지인으로서는 서너 사람이 배터지게 먹고도 3만~4만 원밖에 나오지 않는 술값에 즐거운 비명을 지를 만하다. 게다가 안주의 재료들이 싱싱하고, 음식 맛까지 뛰어나니 그런 호사는 아마 전주 아니면 누리기 어려우리라 여겨진다. 다행히 최근 시에서 막걸리를 특화하여 전국적인 명소를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어, 좀더 나은 서비스에, 상인들도 혜택을 입는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해보기도 한다.

삼천동, 서신동, 동부시장 등이 막걸리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인데, 대표적인 집으로는 삼천동의 마이산청정막걸리, 서신동의 홍도집, 동부시장 입구의 한울집 등이 있다. 어느 곳이나 술맛 좋고 안주맛 좋은 곳들이지만, 마이산청정막걸리는 특히 술맛이, 안도현 시인이 잘 다닌다는 홍도집은 원래 유명한 횟집이었던 관계로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안주가, 한울집은 허름하면서도 정겨운 분위기가 좋다. 특히 한울집은 안주를 입으로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으러 가는 집으로 유명하다.

이 집에는 스스로 ‘임플로이’라 부르는 종업원 김형남 아주머니가 있는데, 전주사람들은 그를 ‘콩글리시의 대가’라고 부른다. 모든 주문을 영어로 받는데, 빈커드(두부), 스트로베리(딸기) 등은 기본이고, 마른고구마는 드라이스위트포테이토, 미나리는 부르기 어려우니 그냥 ‘미’ 빼고 나리인 릴리, 김치는 어차피 영어로도 김치니까 영 재미가 없어 도치법을 써서 치김, 북어는 노스피시, 돼지머리고기는 피그헤드살로우만, 심지어 굴무침은 오이스터공구리로 불러 사람들을 포복절도하게 한다. 꼬막은 아나다그라노사인데, 본인의 익스피리언스(경험)에 의하면 이게 가장 어려워서 외우는 데 무려 3일이 걸렸다고 익살을 떨기도 한다.

그런데 한울집(063-287-2787)에서 만나기로 한 대작 상대는 하필이면 영어선생이었다. 전일고에서 영어를 맡고 있는 황의상 선생은 김씨의 콩글리시를 듣고도 웃기만 할 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꾸가 없다. 어쩌면 그 역시 콩글리시에서 오십보백보 수준인 것은 아닐까. 더욱 가관인 것은 그가 술자리에 깁스에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계단에서 삐끗해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인데, 말로는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면서도 차를 놓고 왔단다. 들어보니 그이야말로 내력 있는 술꾼이었다. 어머니가 자기를 배고 막걸리로 입덧을 했다나 뭐라나.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풍남문 근처의 풍문집이나 후문집에서 연탄난로를 끼고 밤새 술을 펐다는데, 취한 언놈은 난로를 의자로 착각해 엉덩이를 안주로 내놓을 뻔했다는 이야기며, 당시 전주의 상징과도 같았던 미원탑에 오줌누기 내기를 한 이야기하며, 어린 나이에도 작부 뒤꽁무니 따라다닌 이야기, 또 타지에 사는 군대동기에게 안주는 내가 푸짐하게 살 테니 술값만 내라며 불러내렸다는 이야기 등 전라도 특유의 풍기가 적당히 섞인 명정사(酩酊史)를 늘어놓다보니 어느새 그 앞에 놓인 주전자가 배고픈 소리를 냈다. 이것이 전라도의 인심이다. 초면의 손님에게도 무엇인가 퍼주지 못해 안달인 그런 인심,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인데도 조금이라도 안된 경우를 보면 괜시리 ‘짠’해 하는 그런 인정, 그런 것들이 비록 ‘지지리’ 못사는 결과를 불러온 게 아니냐고 턱도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런 심정이 진정 술을 먹는 마음이며, 그런 심사가 바로 사람 사는 것이므로.

전주의 해장국하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콩나물국이다. 또한 콩나물국이 해장에 좋다는 것은 새삼 이를 필요조차 없다. 고사동의 삼백집 등이 유명한데, 삼백집은 지금은 돌아가신 ‘욕쟁이할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그녀는 생전에 지방순시 도중 예고 없이 들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고 ‘네놈은 어찌 그리 대통령을 닮았더냐’고 퍼부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전주는 어디라 할 것 없이 도시 전체가 문화재라 할 만큼 유서 깊은 곳인데, 특히 한옥마을은 전통한옥생활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곳이고, 전주 인근의 완주 송광사는 벚꽃길이 아름답다. 전주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어미산’이라는 모악산은 사철 포근하고 좋은 곳이다.

영남권 마산 통술집

어떤 이는 마산을 일러 ‘물과 불의 도시’라 했다. 몽고간장과 무학소주, 크라운맥주 같은 좋은 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마산의 좋은 물 때문이라는 것이며, 3·15와 부마항쟁 같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뜨거움이 있었기에 불의 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물 좋은 마산’의 명성은 사라져버렸다. 바다 역시 이은상이 그토록 ‘가고파’ 했던 ‘그 파란 물’도 ‘그 잔잔한 고향바다’도 아니다. 1970년 마산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는 커다란 이익을 안겨다 주었지만, 동시에 극심한 공해라는 불청객을 불러오면서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기고 말았다. 더구나 창원 쪽에 대규모의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창원의 배후도시로 주저앉고 말았고, 그마저도 창원-진해 간 터널이 뚫리면서 진해 쪽에 그 역할을 빼앗기고 있는 형편이다.

노동집약산업의 현저한 퇴조와 함께, 도청은 창원으로 가고, 쾌적한 주거환경은 진해에 밀리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서울이나 부산보다 집값이 더 높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세 좋던 처지에서, 이제는 창원, 진해 등과 통합이나 바라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산은 이제 물의 도시는 아닐지 몰라도 여직 불의 도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여전히 뜨겁기 때문이다. 시인 이달균은 이렇게 노래했다.

막연한 분노도 괜찮은 안주가 된다/시인은 모름지기 겨울에 태어난다고/잘 익은 고갈비 몇 점 둘러앉아 마시곤 했지//우리 앉은 곳이 중심인가 변방인가/허튼 말씀의 사원 허물고 또 짓지만/성에 낀 창에 비치는 별들 빛나지 않았지… 바람은 왜 자꾸 아랫도리로 부는지/골목에서 단체로 부실한 오줌을 눈다/갈라진 오줌은 줄지어 합포만으로 가는데//싸락눈 오는 밤 우리는 어디로 가지/설익은 밥풀들처럼 선 채로 풀풀대다가/깃발도 다짐도 없이 허청이며 흩어져 갔다 -이달균 ‘우리 기쁜 언더그라운드 2

그는 한참시절 어시장 안에 있던 속칭 ‘홍콩바’에서 장어 몇 점에 독한 술로 배를 채우며 젊음을 분노로 탕진했다. 호기 좋은 술친구들은 2층 다락방에서 창을 열고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은 곧바로 바다로 떨어졌다. 당시 마산은 수출지역의 호황으로 최대의 번성기를 맞고 있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마산에 사는 스물한 살에서 스물네 살까지의 인구가 4만 명쯤이었는데, 그 중 남자는 1만5000명, 여자는 2만5000명 정도였다. 여성들의 대부분은 경상도 구석구석에서, 아니면 멀리 전라도에서까지 몰려온 여공들로, 그래도 청춘이라고 저녁이면 코스모스 고고장 쯤에 모여 젊음을 불태웠다. 그러나 아무리 청년문화를 흉내내봐도, 그곳은 변방이었고, 그들은 그저 꽃다운 ‘공순이’들일 뿐이었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마산에는 새로운 주점풍속도가 생겨났다. 이른바 ‘통술집’으로 기본 술을 시키면 안주가 거저 나오는 통영의 ‘다찌노미집’과 비슷한 형태였다. 통술집이 크게 유행을 하면서 외지인들에게도 각광을 받게 되자, 시에서는 아예 신마산의 두월동 일대에 통술거리를 조성하고 관광지역으로 집중 육성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통술집들은 면모를 일신하기는 했지만, 그에 따른 유지비와 해산물 가격의 급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장사의 형태도 조금 변화를 갖게 되었다. 이 시인의 안내로 찾은 뜨락집(055-222-2837)만 해도 안주 한 상에 기본 4만 원, 술은 맥주로 시킬 경우 병당 3500원, 3병에 1만 원, 소주는 5000원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뜨락집은 분위기가 아늑하고 깔끔한데다 좋은 재료들을 사용하여 제법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이 공동화되어가고 있는 지금, 마산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한때 마산만을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치기도 했으나, ‘그 잔잔한 바다’가 물의 빠른 드나듦을 막는 장애요소로 작용하면서 오염을 정화하려는 노력은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마산의 그 오랜 문화적 전통과 불의에 맞서 싸웠던 정기를 되살린다면, 제2의 도약인들 어찌 불가능하기만 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마산을 멀리서 회상이나 하며 ‘가고파’ 하는 도시가 아니라, 마산 시민 스스로가 ‘있고파’ 하는 도시로 만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마산에서의 최고 속풀이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복국이다. 아구찜으로 유명한 오동동에는 복국거리가 있다. 광포복집, 충무복집 등 고만고만한 복집들은 제각각 조금씩 다른 요리법으로 손님을 맞고 있다. 그리운 ‘남쪽바다’를 찾기엔 아무래도 봄날이 제격이다. 이른 봄 마산의 무학산으로도 모자라 창원의 천주산, 비음산까지 온통 진달래의 ‘연분홍 치마’로 물들인 뒤, 한껏 무르익은 봄은 안민고개를 넘어 진해 앞바다로 분분한 벚꽃 눈발이 되어 흩날린다. 그리고 마침내 봄날은 간다. 저도를 잇는 연륙교는 영화 ‘인디안 썸머’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다.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을 받고 있다(뉴스메이커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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