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by 류.. 2005. 9. 20.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친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멀고 귀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 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 나오며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 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나희덕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사, 2001)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억새  (0) 2005.09.22
        들꽃  (0) 2005.09.20
        어딘가에서 올지도 모를..김승동  (0) 2005.09.17
        슬픔으로 가는 길  (0) 2005.09.15
        숨길 수 없는 노래  (0) 2005.09.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