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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집

이순원과 은비령

by 류.. 2005. 5. 21.

 

 

新 문학기행 <41> 이순원과 은비령
작품속 상상공간 공식지명으로 채택

 
설악산에는 이런 고개도 있다. '은비령(隱秘嶺)'이라는 곳이다. 이름처럼 신비한 고개다.
지도상에는 그 이름은 없었고 지역 주민들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있어도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길은 없다. 되돌아 와야 하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신비의 고개. 은비령은 곧 공식적으로 지명을 부여받는다.
지도상에도 표기된다. 소설문학이 일군 성과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양양 방향으로 1㎞ 가량 내려가다
필례약수터로 빠지는 오른쪽 샛길에 접어들어 한계령의 다른 허리 중간을 되넘는 곳이 은비령이다.



新문학기행팀은 41차 행선지로 이곳 은비령으로 잡았다. 주인공은 당연히 소설 '은비령'의 작가 이순원.

지난 16일 부산을 출발해 국도 7호선을 쭉 따라 동해 바다를 끼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간 기행팀은 이날 밤늦은 시간 이른바 '은비령 타운'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깊은 밤 은비령에서 본 하늘에는 총총히 박힌 별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2500만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별빛은 참 밝았다.은비령 가는 길은 정말 힘들었다. 버스가 낭떠러지를 옆에 둔 고갯길을 넘어넘어, 꼬불꼬불 길을 헤쳐나갈 때 독자들은 아찔아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질어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순간 가슴이 서늘했다.

"작품을 발표한 뒤 독자들과 함께 관광안내 삼아 들리는 일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어요."

작가 이순원은 이제 '은비령'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난 1996년 발표된 이 작품은 이듬해 제42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중년 남녀의 사랑이다. 언뜻 고리타분한 주제를 다룬 것으로 보이지만 아주 서정적이고 빼어난 '그 무언가'가 숨어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나는 소설가로 아내와는 이혼 직전인 상태. 그리고 여느 '중년 남녀 소설'처럼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다. 여자는 '나'가 소설로 방향을 바꾸기 전, 은비령에서 고시공부를 함께 하던 친구의 아내였다. 행정
 
고시에 합격, 공무원이었던 친구의 행복한 아내였던 여자를 보고 '바람꽃'을 떠올린다. 나는 과부가 된 여자를 사회보험보장연합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친구가 격포에서 사고로 죽은 뒤였다.

그리고 마음의 짐이 더해지는 그 여자와의 사랑으로, 나는 그 짐을 덜어내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 여자와 결합을 마음먹고 친구가 죽은 장소인 격포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눈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친구와 함께 고시공부를 했던 은비령으로 향한다.

눈길에서 차가 고장나고 다음날 뒤쫓아 달려온 그 여자를 만나게 된다. 둘을 부부로 오인한 옛 하숙집 노인네들 때문에 한 방을 쓰게 된다. 어색한 잠자리를 피하기 위해 밤산책을 나온 둘은 밤늦게 별자리를 관측하는 남자로부터 은하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2500만년을 주기로 다시 되풀이되는 사람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여자는 2500만년을 기약하고 혼자 떠난다. 은비령에서 둘은 영원한 사랑을 확인한 것이다.

소설은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은비령'을 빼어난 문학공간으로 되살렸다. 주인공의 차가 은비령의 경계에 들어서자 시계가 멈추어 버린 신비한 장소. 은비령에서 작가는 겨울 은비령의 눈 내리는 풍경과 장작으로 밥을 지을 때 안개처럼 낮게 피어올라 바깥 마당을 매콤하게 감싸는 저녁연기 등 '은비팔경'을 재창조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은비령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으며 TV문학관을 통해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실제 이곳 주민들은 이 고갯길을 한계령이라도 불렀다. 또는 작은 한계령, 필례 약수터가 있다고 해서 필례령이라고도 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은자가 사는 땅이라고 해서 은자령(隱者嶺)이라고 부르다가 신비롭게 깊이 감춰진 땅이라는 의미에서 은비령이라고 한 것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기고."

작가는 웃으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필례 약수터가 주변에는 '은비령 타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에서는 은비령과 은비령 길을 공식지명으로 지정했다. 문학 작품 속의 무대지명이 공식 표기되는 아주 드문 사례가 된 것이다.

이순원은 1958년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88년 '문학사상' 신춘문예 당선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떠오른 젊은 작가군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로 우뚝 선다.

작가는 타락하고 훼손된 삶의 풍경을 차분히 응시하는 시선이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두운 색채를 띠고 있는 삶의 모습을 다루지만 결코 차갑지 않으며 아름다운 무늬를 빚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1996년에는 동인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우리들의 석기시대'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에덴에 그를 보낸다' '수색, 그 물빛 무늬' '그대 정동진에 가면' 등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특히 고향 강원도를 배경으로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은 작가의 문학적 샘터인 것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고향 하늘에는 별이 총총. 어릴 때부터 보아온 그 풍광은 고스란히 문학작품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은비령'도 그렇다. 여기에다 어릴 적부터 천문학을 좋아하는 작가의 상상력이 작품성을 더욱 올려놓는다.

작가는 화성의 위성을 처음 발견한 천문학자인 홀의 유머를 떠올리면서 작품을 구상했던 것이다.

홀 박사가 하버드 천문대의 조수로 일하던 시절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인간은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다 2500만년을 주기로 다시 똑같은 장소에서 만나 똑같은 일을 하게 되니 그때 값을 지불하겠다"고 하자 식당 주인은 "외상으로 해줄테니 2500만년 전의 외상값은 지금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유머를 단순한 유머로만 보지 않았다.

기행팀은 작가와 함께 은비령에서 밤을 새운 뒤 한계령에 올라 멋진 풍광에 잠시 넋을 놓았다.

작품 '은비령'에서 주인공은 한계령 휴계소에서 눈길을 가기에 앞서 잠시 멈추어 선다. '그날'처럼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멀리 산 정상 곳곳에 잔설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한계령 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눈길 가는 곳마다 빼어난 경치가 펼쳐졌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비경이다. 이곳 사람들이 자랑하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살아 숨쉬는 땅'이다.

바위 천지에다 껍질이 벗겨진 자작나무 군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빨간색 소나무도 있다. 금강산 미인송이라는 적송이다. 산 머리에는 떡갈나무 군락도 보였으며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동박나무는 노란 꽃을 활짝 피웠냈다. 설악산에도 봄은 왔다는 것을 기행팀은 느낄 수 있었다.

은비령 끝자락에는 계곡을 따라 갈대숲이 우거져 있다. 이곳에서 하추리 방향으로 쭉 내려가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물이 흐르는 내린천이 나온다. 작가 이순원은 그 모든 비경을 가슴에 담고 산다.

이순원은 부산으로 떠나는 독자들에게 곧 장편소설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많이 읽어달라는 부탁도 빠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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