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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원형의 섬 청산도

by 류.. 2005. 5. 14.
 

 

▲ 논둑도 밭둑도 담도 모두 돌로 쌓여져 있다. 둥글게 막아진 돌들의 선으로 이뤄진 청산도
 

 

청산도에서는 돌들이 선을 만들고 구획을 짓는다. 버선목에서 버선코로 흐르는 선처럼 유연하게 흐르는 돌담 속에는 사실 청산도 사람들의 모진 삶이 녹아들어 있다. 청산도의 곡선은 곧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다.
집과 집을 구분짓는 돌담들은 제멋대로 뻗고, 단장되지 못한 다랑이논들은 층층이 돌담을 딛고 서 있다. 무수한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을 그 돌담들로 청산도는 존재의 가치를 얻고 비로소 청산도일 수 있다.
읍리 주민 이주남씨는 “청산도가 원래 물도 바다도 하늘도 모도 다 푸르다고 혀서 청산인디 실상 따져보문 푸른 것보담 돌이 더 많제. 온통 다 돌 천지라 집이고 논이고 간에 독댕이 안 들어간 것이 없응께”라고 말했다.

 

▲ 담리 돌담길을 배경으로 한 <서편제>의 한 장면

 

다랑이논 구들장논…살아남기 위한 곡선
돌들의 섬 청산도, 그 땅은 돌이 너무 많아 농사를 부칠 땅이 부족했다. 땅속에서 파헤쳐 낸 그 엄청난 돌무더기들은 실상 한 톨의 식량이라도 더 얻기 위한 섬사람들의 몸부림이었던 셈이다.
‘청산도에서 나고 자란 처녀가 뭍으로 시집갈 때 쌀 서 말만 먹고 가면 부잣집’이란 말이 예사로 쓰였으니 어려움은 쉽게 짐작된다. 삶이 주는 고통의 농도가 짙을수록 사람은 더욱 치열해진다. 청산도 사람들은 무수한 돌담들로 그것을 증명한다.
청산도의 논둑과 밭둑은 모두 돌담으로 만들어졌다. 산비탈에 하나씩 둘씩 돌을 고르고 논밭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둑이 돌담으로 쌓여졌다.

그렇게 쌓고도 남아도는 돌이 엄청났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중담’이다. 청산도를 둘러보다 보면 산처럼 거대한 돌무더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섬사람들은 논밭을 일구는 과정에서 둑을 만들고도 남는 돌을 모두 한곳에 쌓았다. 그 엄청난 돌들을 해결하기 위한 고심의 흔적이 중담의 형태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가끔씩 청산도를 찾아드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움으로 비치기도 하는, 섬사람들도 배 굶을 일 없는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유산처럼 여기기도 하는 그 돌들의 애환은 논바닥에도 그대로 옮겨져 있다.
논바닥에 구들장처럼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부어 만든 ‘구들장논’이 그것이다. 흙이 부족해 조금이라도 흙을 아끼고자 했던,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쌀을 많이 얻고자 했던 섬사람들의 노력이 구들장논에는 모두 담겨 있다.
김현곤(73·신흥리)씨는 “저 논들이 다 여그서 살아온 우리 조상들이 맹근 것이제. 지금이야 기계라도 있응께 쉽제만 옛날이사 일일이 손으로 해야 쓴께 얼매나 시간이 걸릴 것이여. 지금도 농사짓다 보문 수도 없이 돌덩어리들이 나온디 저 돌담 논둑들이 전부 살라고 발버둥친 결과라고 보문 되지”라며 돌담에 담긴 세월을 설명했다.

특히 청산도의 논들은 바닥이 자갈 투성이라 물 빠짐이 심하고 덩달아 벼를 발육시키는 양분도 쉽게 빠져나갔다. 뭍과 달리 청산도의 논밭에서 유난히 많은 퇴비더미들을 만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더구나 청산도는 섬이기 때문에 물도 귀했다. 지금도 섬 전체를 통틀어 저수지가 하나밖에 없다. 때문에 섬사람들은 논물이 잘 빠져 유난히 가뭄을 심하게 타는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논 가장자리에 ‘둠벙’(웅덩이)을 여러 개씩 만들었다.

 

 

▲ 농촌에서 그 흔항 경운기 한 대 찾아보기 어려운 청산도. 논들이 모두 기계가 들어가기
힘든 다랑이논인 까닭에 아직도 농사에 소가 이용된다.

 

 

영화 <서편제>에 나온 당리 돌담길
굽이치듯 휘어드는 청산도 돌담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당리 돌담길이다. 기획되는 순간부터 절대로 대중적인 흥행을 얻어낼 수 없을 것으로 단정지어졌던 영화 <서편제>. 그러나 서편제는 1993년 개봉돼 한국영화 최초로 관객동원 100만명을 훌쩍 넘겨버렸다.
황톳길을 터벅터벅 내려오는 세 사람이 있다. 근심 가득한 얼굴들이 진도아리랑 가락에 풀어지고, 길을 다 내려왔을 즈음에는 어깨춤까지 덩실거린다. 영화 <서편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장면이다. 이 화면을 만들어낸 곳이 바로 청산도 당리 돌담길이다.

이 길은 1996년 콘크리트로 뒤덮였다. 농사일에 불편하다는 주민들의 요구가 모아진 결과였다. 임권택 감독은 길의 서정이 사라진 그 콘크리트 돌담길에 서서 가슴을 치며 서운해했다고 한다. 촬영 당시 그 돌담길이 너무 아름다워 애초 계획보다 훨씬 길게 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임 감독의 말이니 그 서운함의 깊이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영화 속 풍경에 반해 일부러 그 황톳길을 찾았던 사람들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5년의 시간이 지난 2001년 단단하게 뒤덮였던 콘크리트가 벗겨지고 그 길의 절반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임 감독과 여행객들의 끊임없는 요구가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길의 운명은 사실 사람들의 생각이나 편의에 따라 결정된다. 문제는 그 생각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옛길을 되살린다면 누구나 반길 것으로 생각했지만 복원의 이면에는 그 길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반대도 있었다. 매일 그 길을 밟고 오가며 들일을 하는 사람들, 길의 주인임에 틀림없는 청산도 주민들이다.

청산도 당리 돌담길은 가끔 찾아드는 여행객들에게는 아름다운 감상과 미학의 공간이지만 주민들에게는 길이면서도 또한 삶 자체였다. 그곳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은 비 오는 날 질척이는 그 황톳길이 무던히도 불편하고 번거로웠을 것이다.
청산도 주민 김정남씨는 “꾸불꾸불한 황톳길이 보기에는 좋은디 직접 살라문 징하제. 비 온 다음에 일하러 밭에 갈라문 신발에 흙이 한 덩어리씩 엉겨붙어. 근다고 또 저 흙길 볼라고 외지서 여그 섬까지 들어온 사람들 그냥 돌려보내기도 미안시럽제. 반은 시멘트고 반은 흙인께 그냥 불편혀도 참고 살아야제 어쩌꺼시여”라고 말했다.

 

▲ 어느 것 하나 모난 구석이 없는 갯돌들이 모여있는 진산리 갯돌밭.

 

갯돌…둥근 것들이 이루는 한세상
청산도는 온통 둥근 것들의 천지다. 논둑과 밭둑, 돌담들이 모두 둥글게 말아져 있고 해변을 채운 갯돌들도 오랜 세월 파도에 닳고닳아 둥글게 윤기를 낸다. 길조차 모두 둥근 곡선을 그린다.
특히 진산리 해변의 돌밭에서 만나게 되는 갯돌들은 어떤 것 하나도 모난 구석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때문에 청산도 바닷가를 채우고 있는 일곱 군데의 갯돌밭 가운데 돌이 가장 곱고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600여 미터의 해변을 가득 뒤덮은 갯돌은 그 크기도 일정치 않다. 엄지손톱만한 것에서부터 어른 머리통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색깔도 검은색, 흰색, 노란색 등 가지가지다. 갯돌밭에 서 있으면 파도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갯돌들이 밀려 왔다가 빠져나가는 파도에 휩쓸려 ‘타다닥’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청산도는 섬 자체도 둥글어 한참을 돌다보면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둥근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다시 그 자리, 길의 시작점이 되는 도청항에서 어느 쪽으로 향하든 상관없이 직진하면 모두 같은 자리로 되돌아온다.
빼곡이 돌이 들어차 있는 섬 청산도. 거기 온갖 둥근 것들이 이루는 원형의 한세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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