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은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느라 비린내가 포구에 넘치고, 토선(土船)과 딴장이, 당도리선들이
황산(黃山)과 세도(世道)로 마주 나누어진 포구에 담처럼 둘러서서 꽹과리를 쳐댔고 화장(火匠)들이
내뿜는 연기로 포구의 하늘은 다시 암회색 바다였다. 한 달에 여섯 번이나 열리는 장에는 전라도의
곡식과 경강(京江)으로 가는 조곡과 화물이 포구에 쌓였다….'
소설가 김주영이 '객주'에 그려놓은 강경 옛 장터의 모습이다. 시끌벅적한 장터 풍경이 선연하다. 강경은
1920년대에 '1원산 2강경'이라 해서 전국 2대 포구였고, 해방 전까지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강경천을 낀 옛 장터거리에는 극장, 술집, 요정, 정미소, 젓갈집 등이 즐비했다.
이제 많은 것이 사라져 볼 것이라고는 낡은 일제시대 건물 몇 채와 쇠락해가는 젓갈시장 밖에는 없는 곳
예전에 비해 멋스러움이 사라져버린 반듯하기만한 금강 물줄기와 포구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것이라고는
황산대교 옆에 작은 등대 하나 달랑 남아있으나 아직도 해 넘어갈 무렵 옥녀봉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곳.. 사라져가는 것이 많을 때는 남아있는 것이 더욱 소중해진다
누군가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한다'고 했으나 마음 속에 뭔가 횡하니 바람이 불어올 때 나는
강경포구 옥녀봉을 오른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 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 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살 열 몇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일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저물 무렵/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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