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847 입동 즈음에.. 요즈음은 자주 쓸쓸한 느낌이 든다.부모님은 나를 멀리 둔 채 떠나시고동생들도 하나씩 다 세상을 등져밤이면 긴 말 나눌 사람이 없어혼자서 빈 밤을 둥둥 떠다닌다. 시끄러운 것이 귀찮고 멀미 나서사람들 별 없는 곳에서만 뒹구니신경 안 쓰고 눈치 안 보아 좋을 것 같지?옆을 지나다니는 것은 바람과 비와 먼지나무나 덩굴 열매는 혼자 열렸다 혼자 진다. 오래 같이 사는 나이든 아내도이제는 잘 웃지도 않고, 가끔나를 이웃처럼 물끄러미 쳐다본다.나도 아내를 덤덤한 미소로 스친다.우리들 기념일이 입동 즈음인 것을겨울이 한참 깊어서야 기억해낸다.다음에는 잊지 말자고 다짐하지만이 미안한 마음은 또 얼마나 갈지. 만나고 싶은 이들은 모두 너무 멀리서오라는 손짓만으로 나를 흔드는데그래도 봄이 와서 노란 산수유꽃 피면나도 기지.. 2025. 11. 7. 가을밤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 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내가 까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 땐 머리 위에 일찍 뜬 별이 돋고 먼 산 오리나무 숲 속에선 비둘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실어 .. 2025. 10. 6. 들꽃에게.. 어디에서 피어언제 지든지너는 들꽃이다 내가 너에게 보내는 그리움은오히려 너를 시들게 할 뿐,너는 그저 논두렁 길가에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인간이 살아, 살면서 맺는숱한 인연의 매듭들을이제는 풀면서 살아야겠다.들꽃처럼 소리 소문없이보이지 않는 곳에서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한 하늘 아래너와 나는 살아있다.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살 수 있고나에게 허여된 시간을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그냥 피었다 지면그만일 들꽃이지만홑씨들 날릴 강한 바람을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서정윤 2025. 9. 29. 저물 무렵..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 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 2025. 8. 7. 그집앞 능소화 이를테면 제 집 앞뜰에 능소화를 심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여름날에, 우리는 후두둑 지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 집 담장 아래서 다리쉼을 하고 모든 적막을 뚫고 한바탕의 소요가 휩쓸고 갈 때, 어사화 같은 능소화 꽃 휘어져 휘몰아쳐지고 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집의 좋은 향기에 가만히 코를 맡기고 잠시 즐겁다 능소화 꽃 휘어진 줄기 흔들리면, 나는 알고 있다 방금 내가 꿈처럼, 혹 무엇처럼 잠시 다녀온 듯도 한 세상을 -그집앞 능소화/이현승 2025. 7. 5. 푸른국도 길가의 집 앞에 기다림이 쪼그려 앉아 하염없는데 끊길 듯 끊길 듯 필사적으로 뻗어간 이 길 길을 오가며 보던 차창에 비치던 옛 얼굴은 어디서 미라같이 쪼그라들고 있는지 길은 블랙홀로 자꾸 나를 빨아들이고 나는 소실점 하나로 길 위에 남았지만 그래도 사고다발지역을 지나면서 이 곳에 이르러서 불행해진 사람을 위해 성호를 그으면 폐가가 있는 길가의 쓸쓸한 풍경이 담뱃불 같이 잠시 환해진다 옛날 푸른 등같이 사과가 매달렸던 길가의 과수원이 사라졌는데 탱자 꽃 하얀 관사의 오후도 사라졌는데 아직도 길 위에 자욱한 사라지는 것들의 발소리 그래도 사라지는 것들을 배려해 누가 켜준 저 가물거리는 등불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 2025. 5. 24. 모슬포에서 오래도록 그리워할 이별 있다면 모슬포 같은 서글픈 이름으로 간직하리. 떠날 때 슬퍼지는 제주도의 작은 포구, 모슬포. 모-스-을 하고 뱃고동처럼 길게 발음하면 자꾸만 몹쓸 여자란 말이 떠오르고, 비 내리는 모슬포 가을밤도 생각이 나겠네. 그러나 다시 만나 사랑할 게 있다면 나는 여자를 만나는 대신 모슬포 풍경을 만나 오래도록 사랑하겠네. 사랑의 끝이란 아득한 낭떠러지를 가져오고 저렇게 숭숭 뚫린 구멍이 가슴에 생긴다는 걸 여기 방목하는 조랑말처럼 고개 끄덕이며 살겠네. 살면서, 떠나간 여잘 그리워하는 건 마라도 같은 섬 하나 아프게 거느리게 된다는 걸 온몸 뒤집는 저 파도처럼 넓고 깊게 깨달으며 늙어가겠네. 창 밖의 비바람과 함께할 사람 없어 더욱 서글퍼지는 이 모슬포의 작.. 2024. 9. 7. 잊혀진 정원 잊혀진 정원에는 배롱나무꽃이 가득하다. 세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후 마음에 새겨둔 그리움은 없었지만 염천의 더위를 이끌고 여름이 지나가는 길목이면 옛 선비가 머물렀던 뜨락에 열꽃처럼 붉은 자미화가 피어오른다. 花無百日紅이요 人無千日好라 꽃은 피어서 백일 동안 붉은 수 없고 사람은 천 일이 지나도 한결같이 좋을 수 없으니 지나간 무엇이 한스러울 수 있으랴만 뜨거운 태양 아래 구름처럼 일어나는 꽃들은 생의 모진 미련과 애모를 보여 주는 듯하다. 주렴에 머물던 달빛처럼 다정하고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처럼 굳건하였건만 .. 2024. 8. 1. 양수리로 오시게 가슴에 응어리진 일 있거든 미사리 지나 양수리로 오시게 청정한 공기 확 트인 한강변 소박한 인심이 반기는 고장 신양수대교를 찾으시게 연꽃들 지천 이루는 용늪을 지나 정겨운 물오리 떼 사랑놀이에 여념이 없는 아침 안개 자욱한 한 폭의 대형 수묵화 이따금 삼등열차가 지나는 무심한 마을 양수리로 오시게 그까짓 사는 일 한 점 이슬 명예나 지위 다 버리고 그냥 맨 몸으로 오시게 돛단배 물 위에 떠서 넌지시 하늘을 누르고 산그림자 마실 나온다 저녁답 지나 은구슬 보오얗게 사운거리는 감미로운 밤이 오면 강 저편 불빛들 일렬종대로 서서 지나는 나그네 불러 모으는 꿈과 서정의 마을 .. 2024. 7. 6. 이전 1 2 3 4 ··· 9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