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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대청호 오백리길

by 류.. 2015.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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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따라 대청호 따라

 

충청권의 젖줄이라 부르는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에서 발원한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일반적인 강줄기와 달리 금강은 남쪽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거슬러 오른다. 진안고원을 지나며 용담호를 만들고 다시 흘러 충청남도 금산군과 충청북도 영동군, 옥천군, 청원군 등을 지난다. 이곳에서 대청호를 만든다. 대청호에서 잠시 갈 길을 멈췄던 금강은 충청북도 청원군 부강면 즈음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미호천을 더하고 백제 고도인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을 차례로 지난다. 공주에서 남서쪽으로 고개를 돌린 금강은 논산군을 지나 전라북도 군산시와 충청남도 서천시 사이에서 도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든다. 금강은 천 리다.
금강은 충청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다. 공주와 부여라는 백제 왕도가 금강에 기대어 건설되었고 내륙 깊숙한 곳까지 물줄기가 이어지며 황포돛배와 뗏목 등을 이용해 농수산물을 비롯한 다양한 물자를 옮겼다.
그 금강 줄기에 기대 1980년, 대청댐을 만들었다. 대청댐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와 대전 대덕구 신탄진동 사이 금강 본류를 가로지른다. 대청댐으로 막힌 금강은 호수를 만들었다. 대청호 아래로 마을을 잃은 사람들은 산 위로 올라와, 이제는 대청호와 함께 살아간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대청호를 동무 삼아 도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은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삶’에 관한 사유의 시간을 주고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힌다. 대전, 옥천, 보은, 청원의 경계를 넘나들며 흐르는 대청호를 따라 걷다 보면, 많은 것이 마음속에서 경계 없이 허물어진다.

 

 

<1구간>

 

- 대청댐 물문화관
물을 담아 이야기하는 길

 

 

1980년 완공한 대청댐은 은빛 물길을 막아 호수를 만들었다. 댐은 높이 72m, 길이 495m의 중력식 사력댐이다. 흐르던 물은 갈 길을 잃고, 사람이 살던 곳으로 올라와 호수가 되었다. 강물이 산자락과 만나 구불구불한 선을 만든다. 대청댐 조성 이후 생긴 대청호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다.
대청댐 건설로 수몰예정지역에 있던 4075세대 2만 6천여 명의 주민은 모두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마을은 물을 품었지만, 사람을 잃었다. 사람도 물을 얻은 대신 고향을 잃었다. 대청댐 주변에 공원 등 휴게시설과 함께 만든 대청댐 물문화관은 고향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며 이들 삶을 기록해 두었다. 금강 주변 마을과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전시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를 연다. 대청댐 물문화관 옆으로는 대청호 오백리길을 시작하는 1구간 진입로가 있다

 


- 민평기 가옥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마을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앞에서 바라본 대청호에 쇠백로가 날아든다. 큰 쟁반을 띄워놓은 듯한 인공습지는 주변 호수 풍광과 잘 어우러진다. 이곳 삼정동은 한 노승이 찾아와 정승 세 명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전역사박물관은 이 마을 명당으로 천혈(天穴), 지혈(地穴), 인혈(人穴)이 있고 이곳에 은진 송씨, 여흥 민씨, 충주 박씨가 각각 묘를 써 크게 일어났다는 후대 이야기를 전한다. 이중 여흥 민씨, 민후식 선생이 지은 ‘전통 가옥’이 이 마을에 있다. ‘민평기 가옥’이라 부르는 이 가옥은 조선 말 고종황제의 승지를 지낸 민후식 선생이 ‘삼정골’ 마을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처음 지은 것이다. 민후식 선생은 구한말 혼란스런 중앙정치권을 벗어나 초야에 묻혀 생활하기 위해 산과 강이 함께 보이는 이곳으로 내려왔다. 이후 여흥 민씨 4대가 연이어 이곳에 살았다.

19대 장손인 민후식 선생부터 22대 민평기 선생까지 마을을 지켰다. 이후 댐 건설로 물이 차오르고, 마을이 사라졌다. 민평기 가옥은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대청댐 위로 올라왔다.
“저기 지금 물이 찬 곳에 삼정골이 있었어. 처음 시집올 적에는 거기로 시집을 갔지. 자식들은 외지로 나가고, 지금은 남편이랑 나랑 둘만 있어.”
22대 종부인 김화중 할머니 이야기다. 가옥은 야트막한 언덕에 기대어 섰다. 가운데 마당을 두고, 입이 트인 ‘ㅁ’자 형이다. 이전하면서 목조 일부분이 벽돌조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당에서 안채로 올라서는 기단이 무척 높다. 행랑채를 양 옆에 두고 대문을 만들었다. 마당에 들어서면 ‘ㄱ’자 형태로 안채를 배치했다. 동향에 야트막한 구릉이 집 뒤편을 위압적이지 않게 막아주어 안온한 느낌이다.

 


이현동생태습지공원

 

 

대청호 오백리길을 따라 걸으며 느끼는 재미 중 하나는 표지판 찾기다. 곳곳에 숨은 표지판을 찾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대청호 두메마을(www.dumevil.com

)을 만난다. 두메마을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던 전옥순 할머니에게 ‘담배창고’ 위치를 물었다. 담배농사는 농촌에서 소와 함께 중요한 수익원이었다. 그때는 담배창고가 시골 마을에 몇 개씩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흙담으로 높이 솟게 만들어 놓은 담배창고는 정미소와 함께 마을에서 도드라졌던 근대 풍경 중 하나다. 담배창고가 이 마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쉽게 사라진 후였다.
“담배창고가 있었지. 근데 작년인가에 없어졌어. 낡아서 부쉈나 봐.”
스무 살에 시집와 육십 년을 마을에서 산 할머니는 변화한 마을을 초연하게 바라봤다.
“변하는 걸 어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올라와 살 사람은 올라오고, 떠날 사람은 다 떠났지. 지금은 사람이 별로 없어.”

마을 뒤로 난 둥글넓적한 산은 배처럼 생겼다고 해서 ‘배산’이라고 불렀다. ‘배오개’라는 마을 이름은 배산 동쪽 아래에 있는 고개 이름에서 따왔다. 마을로 들어오는 고개 초입에 크고 오래된 배나무가 있어 배오개라고 한다. 마을을 찬찬히 바라본 후에야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름이다. 지금은 배 이(梨) 자를 써 이현동이라 부른다. 농촌체험마을을 조성하며 새로 붙인 이름은 ‘대청호 두메마을’이다.
배오개 마을은 깊이 들어갈수록 매력적이다. 남쪽으로는 계족산을, 북쪽으로는 대청호를 두고 들어앉은 마을이 의젓하다. 2012년에 생태습지공원을 조성해 마을은 잘 정돈된 모습이다. 주차장부터 억새 습지로 들어가는 길이 잘 닦였다. 대청호로 흘러가는 개울 하단부에 자리잡은 억새 습지에서는 아직 어른 키만큼 자란 억새를 보지 못한다. 2014년 즈음이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지나던 마을 주민이 말한다. 고개를 둘레둘레 흔들며 걷다 독특한 묘비명을 발견했다. ‘도토리지묘’, 묘비 뒤쪽에는 <2007년 7월 (구) 배오개 주민 일동>이라고 적혔다. 마을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묘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자식도 없이 논 한두 마지기 부치며 살던 사람이 있었어. 마을에서 그이를 ‘도톨네’라고 불렀던 모양이야. 그이가 나이 먹고 갈 때 되니까 동네에 논을 기부했어. 자기 죽으면 묘를 써주고, 제사 지내달라고 유언하면서. 본래는 저 아래 있었는데, 댐 지으면서 묘지를 지금 자리로 옮겼지. 나 어릴 때도 있었고, 훨씬 전에도 있었어. 묘비명은 이곳으로 묘를 이장하면서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지.”

 


<2구간>

 

- 성치산성
풍경을 담은 산성

 

억새 습지 길을 계속 따라 가면 찬샘 마을(

www.chansaem.com

)로 향하는 길이나온다. 찬샘마을은 마을 공간과 자원을 활용한 체험마을이다. 생계수단이었던 농사가 체험수단으로 변하는 모습을 조금씩 볼 수 있다.
찬샘마을을 지나 부수동에서 멈춘다. 부수동은 연화부수(蓮花浮水: 연꽃이 물에 떠있는 모양의 명당자리)라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청남대가 호수 건너로 보이는 이 길은 대청호를 따라 자전거를 타는 코스이기도 하다. 청남대를 개방하기 전 그곳을 지키는 군부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곳 부수동 끝자락, 나무 틈새로 보이는 대청호가 눈길을 빼앗는다. 나뭇가지가 만든 거친 틈으로 풍광과 함께 산과 호수가 내뱉는 청량한 숨이 들락거린다.
부수동에서 산길을 따라가면 성치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9호)을 만난다. 보존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 산세를 해치지 않고, 그 결을 따라 이어놓은 산성은 이제 그 흔적만 남았다.

 

 

 

 

 

 

 

 

 

<3구간>

 

- 관동묘려, 송명의 선생 유허비
며느리 의지로 이룬 일부종사

 

 

반듯하게 자란 미루나무가 늘어선 도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면 마산동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0호)으로 오르는 사슴골 입구에 다다른다. 이 길을 따라가면 관동묘려(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7호)와 만난다. 관동묘려는 고흥 류씨(1371~1452)의 제사를 지내려고 1452년 만든 재실이다. 류 씨는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다. 스물 둘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잃은 류 씨에게 양쪽 부모는 고려 시대 풍습대로 재혼하기를 다독였다. 류 씨는 홀로 송유를 등에 업고, 수백 리를 걸어 시댁을 찾아 일부종사를 고집했다. 이후 송유는 12세에 부사정이 되었으나 13세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송명의 때부터다. 송명의가 회덕 황씨와 결혼하면서부터 회덕과 은진 송씨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고려 말 조선 개국에 참여할 것을 거부한 송명의가 아내의 고향인 회덕으로 내려와 정착했고, 쌍청당 송유 대에 이르러 회덕에 은진 송씨의 명성이 높아진다. 이곳에는 송유의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있다. 관동묘려 옆으로 난 길로 조금 올라가면 1835년에 세운 송명의 선생 유허비가 며느리의 재실 위에 있다. 송명의 선생 유허비는 1835년, 선생의 14대손인 송기정이 세우고, 1876년,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세웠다. 대청댐 건설로 선생의 유허비를 세운 마을은 물에 잠기고, 유허비를 이곳으로 옮겼다.


- 미륵원지
회덕 황씨 넉넉한 인심이 어리다

 

 

송명의 선생 처가인 회덕 황씨의 흔적도 관동묘려와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날 수 있다. 관동묘려에서 걸어 20여 분 정도 거리인 미륵원지(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1호)는 고려 말 회덕 황씨 황윤보가 지어 조선 시대까지 후손들이 110여 년 간 운영했던 미륵원이 있던 곳이다. 미륵원지 대부분은 대청호에 가라앉고 일부가 남았다.
경상도 지방 성주에서 황간, 영동, 옥천, 증약을 거쳐 문의, 청주, 천안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던 미륵원은 긴 시간 나그네를 돌보았다. 비영리로 길손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무료로 제공했으며 행려자를 위한 구호활동도 벌였다. 지금은 1980년에 이 터에 복원한 남루가 있다. 남루는 재실로 쓴다.

 

 

미륵원지 남루 옆 살림집에는 황윤보의 13대손인 황경식 할아버지 부부가 산다. 황경식 할아버지의 아내 육애수 할머니는 연신 “황 씨가 나쁜 사람이 없잖아. 참 착해.”라며 회덕 황씨의 품성을 칭찬했다. 할머니는 시아버지를 모시며 수몰 전부터 미륵원지에 살았다.
시아버지는 마을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문을 가르치던 선비 같은 양반이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을이 호수로 덮이고, 지금 자리로 이사 왔다. 재실을 지킬 이가 없어 삼 년 정도만 지키려고 했던 것이 삼십 년이 넘었다.
“한번 자리를 잡으니까 떠나기가 쉬워? 지금도 매년 한 번은 육십 명 정도 모여서 시제를 지내
지. 옛날에는 제사도 자주 지내고, 한번 지냈다 하면 몇백 명씩 왔어. 떡을 열 말씩 말았으니까. 지금은 한 말도 안 해. 여기 앞에 보이는 산이 다 송 씨네 산이라고 하지? 옛날에는 황 씨네 산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아주 옛날이지만, 황 씨네가 송 씨네 외가잖아. 가끔 송 씨네에서 나이 지긋한 분들이 외가라고 인사하러들 오고 그래.”
회덕 황씨와 은진 송씨의 인연은 아직도 묘한 끈이 이어져 움직이고 있었다. 인심 좋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달기둥어리’에 있는 달걀을 꺼내 먹으라며 보여주기도 했다. 달기둥어리는 ‘닭 둥지’의 충청도 말이다. 마당에서 뛰어 노는 닭이 그곳에서 알을 낳는다고 한다. 할머니는 알을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하면, 가끔 병아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며 웃는다. 회덕 황씨 집안의 인심이 새삼 마음으로 다가온다.

 


<4구간>

 

- 신선봉유적
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곳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과 대청호 자연수변 공원 등이 있어 대청호 오백리길 중 대표적인 ‘낭만길’로 꼽힌다. 습지 위에 만들어 둔 데크를 따라 갈대와 들꽃을 만나고 가을에 국화축제를 여는 마을과 연꽃 마을 등이 구간 곳곳에 있다. 이중 S자 갈대밭은 드라마 ‘슬픈 연가’를 촬영했던 곳이다. 드라마 촬영지로 가기 위해서는 마산동 삼거리에서 추동에 가기 전 중간 즈음에서 대청호변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인, 가족이 함께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적절하게 인위적인 장치를 해 둔 길을 걷다가 금성마을에서 산으로 올라서면 신선봉유적(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2호)을 만날 수 있다.
들머리에서 그 산길 중간에 이런 장관이 펼쳐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산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큰 바위 두 개가 보이면, 그 장관이 펼쳐진다는 신호다. 바위 사이로 발을 옮기면, 또 다른 큰 바위들이 육중하게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자동차가 다니고, 농사를 짓는 생활 공간에서 고작 20분 정도도 걷지 않았는데, 마주하는 풍경은 마치 다른 세상 같다.

 

 

신선봉에 산성 형태의 석축이 둘러쌓여 있다. 동·서·북벽은 무너져 내리고 남벽만 남았다. 큰 바위에 글을 새겨 놓은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산성의 기능으로 만들었다기보다 신앙 등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큰 바위에 주술적 의미가 있는 바위구멍도 여럿이다.
가운데 있는 큰 바위는 절반이 갈라져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날 만한 틈새가 있다. 그 위로 덮개돌처럼 보이는 너른 바위가 놓여 있다. 절반이 갈라진 바위 사이 좁은 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앞만 보고 걸을 수밖에 없는 공간적 제약이 신선하고, 신성하다. 틈새 한쪽에 ‘佛(불)’ 자가 크게 주서(朱書)되어 있다. 그 맞은 편 쪽에는 ‘惺惺主人翁 皇皇上帝位(성성주인옹 황황상제위)’와 초서체로 ‘彌神藏(미신장)’이 음각(陰刻)되어 있다. 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경건한 마음은 전해진다.
너른 바위 위에 올라 대청호를 바라본다. 신선이 와도 감탄할 만한 이 자리에 서니, 인간 세상이 참으로 쩨쩨하다.

 


<5구간>

 

- 김정선생묘소일원
‘밥 한 그릇’나누던 정신 대대로 이어져

 

대청호 오백리길 5구간에서 만날 수 있는 문화유산은 김정선생묘소일원(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이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봄이면 벚꽃이 흩날린다. 김정선생묘소일원은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지낸 충암 김정 선생과 관련된 유적이 있는 곳이다.
대문이 닫혀 있어 초인종을 누르니, 이곳에 머물며 일하는 할머니 한 분이 대문을 열어준다.
할머니는 대문 안쪽으로 안내하며, 김정 선생 묘소 앞에서는 꼭 인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외삼문에서 오른편 언덕길을 오르면, 담 너머 왼쪽에 김정 선생의 사당이, 오른쪽에는 이곳에서 사는 종부 최진하 할머니와 식구들이 먹을 농작물을 심은 텃밭이 있다. 김정 선생 부인, 은진송 씨정려각(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을 지나 묘 여러 기가 보인다. 김정 선생과 은진 송씨, 그리고 윗세대 조상들의 묘지다. 김정 선생 내외의 묘 앞에 비석과 문인석이 균형을 이루며 놓였다. 이곳에 서서 기묘사화(1519) 때 감옥에 갇혔다가 금산에 유배된 후 제주도에서 사약을 받은 김정 선생의 마지막 심정을 헤아려본다.
최진하 할머니는 스무 살 때 경주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당시에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서 살았는데, 건물과 묘소가 대청댐 수몰로 물에 잠기게 되자, 경주 김씨 선조의 산이었던 지금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최진하 할머니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산을 깎으며 묘소를 만들고 여러 건물을 지었던 그때를 생각해냈다.
“몇 년 두고 소나무 캐내고…. 일꾼들 먹일 돼지 몇 마리를 잡았는지…. 고기 삶아서 일꾼들 주고, 삶은 국물은 건너편 동네 가져다줬어요.”
김 대감 집 하면 ‘잘사는 집’으로 통했다. 밥을 비는 사람들이 대문 안까지 들어와도 쫓아내는 법이 없었고, 늘 밥 한 그릇을 내주었다. 지금도 그때 마음이 남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음료수 한 병씩이라도 내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곳에서 시월 스무아흐레에 김정 선생의 제사를, 사월 초나흘에는 은진 송씨의 제사를 지낸다. 설과 추석을 합해 한 해 네 번 정도 제사를 지낸다. 문중 사람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도 한다.

 


- 방축골
평화로운 대청호 한 굽이

 

 

한적한 대청호 풍경을 간직하고 싶다면 대청호 수질관리소 주변이 좋다. 대청호 능선을 눈으로 좇으면 풍경에 율동감이 생긴다. 어느 지점에서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그림 같은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지도를 꺼내 들고 발걸음 따라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찾아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6구간>

 

- 토방대 마을, 대추나무단지, 법수리 연꽃단지
옛 기억 꽃으로 피어나

 

토방대 마을은 뒤로 절재산을 앞으로 대청호를 두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몇 마리 개가 너털너털 마을을 돌아다니고, 어떤 개는 편하게 누워 꿀 같은 잠에 빠졌다.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는 절재산 뒤로 흐르는 금강으로 버스도 건너다녔다. 이곳에서 오래 산 한 주민이 옛 기억을 떠올린다.
“바로 저 너머가 보은이잖아요. 큰 나무배가 버스를 싣고 금강을 건너갔죠. 그게 정말 볼거리였는데….”
토방대 마을에는 경주 이씨가 많이 살았다. 지금이야 집성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에 이곳은 경주 이씨 집성촌이었다.
지금 토방대 마을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농토와 집을 대청호 속에 묻었다. 그리고 원래는 밭터였던 지금 마을로 이사해 살고 있다. 대청호를 앞에 둔 한적한 동네가 좋아 다른 지역에서 찾아와 이곳에 정착한 이들도 있다.
대청호에 묻힌 그리운 옛날을 잊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대청호도 토방대 마을의 정겨운 한 풍경이 되었다. 토방대 마을에는 봄이면 온갖 꽃이 피어난다. 벚꽃은 물론, 꽃잔디, 할미꽃, 민들레, 해당화까지.
토방대 마을을 지나 어부동 마을로 향하는 길에 대청호와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을 만드는 두 곳을 지난다. 대추나무단지, 법수리 연꽃단지라고 부르는 곳이다. 보은의 특산물 대추를 재배하는 밭, 갈색으로 익어가는 대추알이 앙증맞다.
법수리 연꽃단지는 연꽃이 피는 여름에 찾으면 좋다. 데크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편하게 걸을 수 있다. 비가 내린 후 신비로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11구간>

 

- 옥천 청마리 제신탑
마을 사람들의 성지

 

안터마을, 피실, 청마리로 향하는 세 갈림길에서 충북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을로 조금 들어가면, 옥천 청마리 제신탑(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호)이 보인다.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쌓았다. 꼭대기에는 기다란 돌 하나가 솟아 있다. 솟대와 장승도 제신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마을 모습을 만든다.
원탑(조산탑), 솟대, 장승, 산신당 등이 복합된 제신탑은 제신당 혹은 탑신제당이라고 불리는 신당유적이다. 마을 뒷산 소나무를 신이 깃든 나무로 여겨 산신당을 만들어 모신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탑, 솟대, 장승 순으로 제사를 올린다.
이 마을에서 나고 계속 살아온 김동훈 씨는 제신탑 주위 잡초를 뽑으며 주위를 가꾸고 있다. 제신탑 앞집에 살고 있어, 틈나는 대로 제신탑을 둘러본다.
“옛날에 교회나 절이 없었으니까 마을 사람들은 여기가 성지였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며 기도도 하고.”
제신탑 뒤로 청마분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분교 앞 넓은 운동장에 공원을 만든다고 한다. 학교는 헐렸지만, 학교에서 자리를 지키던 동상 두 개가 아직 남아 있다. 반공소년 이승복과, 효자 소년 정재수의 동상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이 둘을 교육의 본보기로 여겼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며 많은 것이 변했지만, 제신탑만은 제자리를 지켰다. 청마리 옆을 흐르는 금강 물줄기도 멈추지 않았다. 청마리 바로 앞에 흐르는 너른 금강이 시원하다. 청마리 사람들은 너른 금강 줄기를 젖줄로 삼고, 제신탑을 위안처로 알고 살았을 것이다.

 

 

<12구간>

 

- 옥천 경율당
정자가 된 서당

 

 

옥천 청마리 제신탑은 금강 왼편 마을에 있다. 이곳에서 산길로 말티를 넘어 청동마을을 지나고 가덕교를 건너 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옥천군 안남면에 다다른다. 옥천군 안남면 종미리에는 경율당이 있다.
조선 영조 12년(1736)에 용궁 전씨의 시조 전습의 47대손인 전후회가 세운 옥천 경율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전후회는 율곡 선생의 학덕을 흠모해, 자신의 호를 경율이라 짓고,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고 했다. 경율당은 앞면이 네 칸, 옆면이 두 칸, 팔작지붕이고 네 면 모두 마루가 있는 전형적인 서당의 구조다. 지붕마루 끝에 있는 기와에 ‘옹정30년을유’라는 글이 있어 1730년대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율당 가까이에 논과 밭, 마을이 있다. 경율당 바로 옆에서 깻잎을 따고 있던 양애자 씨는 이곳과 인연이 깊다. 용궁 전씨 집에 시집 와 경율당에서 문중 제사를 지냈던 일이 마치 어제 같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경율당 앞을 지날 때마다 이곳을 들여다본다. 마당에 잔디는 깎았는지, 별일은 없는지…. 마을 사람들은 경율당을 친근하게 생각한다. 마을 곁에 항상 있었던 곳. 비록 발 뻗고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정자라고 부른다.

 


<13구간>

 

- 옥천 독락정
마을에 남은 정자 하나

 

 

옥천 독락정(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이 있는 곳은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다. 안남면사무소가 있는 소재지다. 독락정은 면소재지에서 금강쪽으로 붙어, 둔주봉 자락을 뒤로하고 금강을 앞에 둔 곳에 있다. 금강이 둔주봉을 감싸며 휘돌아 나간다. 겨울에 얼음이 두껍게 얼고 봄이 되어 날이 풀릴 때 쯤이면 언 강이 녹으며 ‘꽝꽝’거리는 강울음 소리를 낸다.
해 질 무렵 연주리는 평화롭기만 하다. 낯선 이의 방문에 짖던 개들도 이내 조용해진다. 이곳은 원래 초계 주씨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많이 흩어졌지만 여전히 주 씨가 많다.
영모사와 영모각을 지나 독락정으로 향한다. 독락정은 조선 선조 40년(1607)에 절충 장군 중추부사 벼슬을 지낸 주몽득이 세운 정자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고 세상을 논하던 정자 역할을 하다가, 후대에 와서 유생들의 학문 연구 장소로 이용했다. 영조 48년(1772)에 고쳐 지은 이후 여러 번 고쳤다.
앞면 두 칸, 옆면 두 칸 아담하고 소탈한 건물 앞과 옆으로 돌담을 쌓았다. 독락정 바로 앞에 대청호가 있지만, 사이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와 대청호로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았다. 독락정 바로 옆의 영모각은 초계 주씨의 옛 사당이며, 영모사는 새로 지은 사당이다.
초계 주씨의 세사(世祀)는 연주리 사람들의 잔칫날이기도 했다. 제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술도 한잔씩 곁들이는 초계 주씨의 세사에는 주 씨가 아닌 마을 사람들도 찾는다.

 


- 둔주봉 정자
한반도 품은 계곡마다 햇살 가득

 

 

둔주봉 정자는 한반도 전망대로 유명하다. 둔주봉 정자에서 밑을 굽어보면 한반도를 좌우로 반전해 놓은 듯한 형상이 보여 많은 이가 찾는다. 사진 동호인들이 그 모습을 담으며,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아져 2007년에 둔주봉에 정자를 세웠다.
둔주봉 정자에서 좌우를 반전해 놓은 듯한 한반도 지형이 잘 내려다보인다. 둔주봉 정자에 앉아 굽은 금강을 바라본다. 햇살 좋은 날, 둔주봉에 오르면 산줄기 계곡마다 아름답게 스민 햇살을 볼 수 있다.

 


<14~15구간>

 

- 안내천 인공습지와 구국정신 어린 가산사

 

금강줄기가 만들어낸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는 둔주봉에서 그대로 산길을 타고 내려가면 옥천군 안내면 면소재지에 닿는다. 이곳에는 안내천 인공습지와 옥천 안내토기 공장이 있다. 인공습지는 조용하게 산책하며 사색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안내토기 공장은 전통방식으로 토기를 제작해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이곳에서 채운산 기슭에 자리잡은 가산사에 걸어가려면 굽이굽이 산길을 타고 장고개를 넘어 안내면 답양리까지 가야 한다.

가산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선 후기 지리지에 가산암이 오래 전에 없어진 작은 암자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기허 영규대사와 중봉 조헌 선생이 승군과 의병을 일으켜 훈련한 호국도장으로 잘 알려졌다.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이 힘을 합해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후, 가산사에서 이를 기려 영정각(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을 짓고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을 봉안했다. 영정각은 조선 숙종 20년(1964)에 지은 것으로 추측하며, 산신각(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은 산신불화를 봉안하기 위한 집으로, 영정각과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본다.
작은 크기의 영정각, 산신각과 한 마당을 둔 극락전 역시 규모가 크지 않다. 아담한 크기의 사찰이지만 품은 기운은 여느 사찰을 능가한다.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의 정신이 서려 있어 그런지 나무 한 그루, 들꽃 한 송이도 범상치 않다.

 


- 분저리 농촌체험마을
여전히 농사짓는 평화로운 마을

 

은운리에서 구름재를 넘어 충청북도 보은군 회남면 분저리 농촌체험마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구름재를 굽이굽이 도는 비포장도로를 오르며 보이는 대청호와 산줄기가 장관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구름재를 넘으면 포장도로가 시작된다. 분저리 농촌체험마을로 들어간다는 신호다.
분저실 마을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1980년에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됐고, 2003년에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조성됐다. 농촌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해 외부 사람들이 자주 찾지만, 이곳에서 오래 산 마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지을 뿐이다.
속리산 자락과 대청호가 만난 풍경을 배경으로 두른 분저실 마을은 깔끔하고 한적하다. 분저리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이해원 할아버지는 대청댐 담수로 인해 생활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학교, 면사무소 이런 디를 10분이면 갔었는디, 지금은 이설도로로 두 시간 걸어가야 햐. 수몰되면서 여기가 아주 섬이 돼서 불편해.”
불편해진 생활보다 서운한 것은 잃어버린 옛 풍경이다.
“금강이 고대로 있으면 점심 먹고도 목욕 갔을텐디. 백사장이 깔려 있고, 좋았지…. ”
옛 금강의 모습은 이해원 할아버지 마음속에서 해를 거듭할수록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수몰의 경험은 마을 사람들에게 상실감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마을은 평화롭다. 마을에는 점점 다른 지역에서 와 정착한 사람이 늘어 간다. 그리고 농촌체험을 하기 위해 마을을 찾는 사람도 늘었다.

 

16구간>

 

- 벌랏한지마을
산과 호수가 병풍을 친 곳

 

 

분저리 농촌체험마을에서 대청호와 산줄기를 돌아 남대문교를 건너 충북 청원군 문의면 벌랏한지마을로 향한다. 벌랏한지마을을 둘러싼 봉우리가 많기도 많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많은 봉우리에 각각 이름을 붙였다. 아가씨봉, 처녀봉, 과부봉, 홀애비봉…. 임진왜란 때 피난한 사람들이 모여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시간이 지나고 이곳은 부촌으로 이름이 났다. 이곳을 ‘삼천 냥 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한지를 생산해 돈을 버니 천 냥, 과일이 많이 나니 천 냥, 산나물과 산채소가 많이 나니 천 냥, 합이 삼천 냥이란 뜻이다.

 

 

집집마다 벽화 작업을 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평화로운 이 마을도 대청댐 담수로 변한 것이 많다. 대청댐을 만들며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 벌랏한지마을의 생활권은 대전이었다.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장성말까지 가 어부동까지 걸어가면 대전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대청호가 생기면서부터 배로 이동하는 길이 막혔다. 마을이 대청호와 접하는 곳에는 아직도 옛 나루터가 남아 있다. 더는 배가 들어오지 않지만, 남아 있는 나루터와 간이대합실이 지난날 금강 줄기를, 물에 잠긴 마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7대째 살고 있다는 한 할아버지는 댐이 생기며 생활이 불편해졌다고 말한다.
“땅도 매매가 되지 않구, 호수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잖여. 그래서 곡식 농사가 잘 안 되야. 좋아진 것도 있지. 금강은 조그맸잖여. 대청호는 얼마나 커. 경치는 좋아졌지….”
할아버지가 말하는 마을 풍속이 재밌다.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이곳은 다른 마을과 거리가 멀어 마을 혼인이 잦았다. 나이가 비슷하고, 성씨만 다르면, 혼삿말이 오고 갔다.

 

 

금강이 대청호로 변하고 물길은 막혔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을을 잇는 신작로가 생겼다. 그 신작로를 따라 벌랏한지마을에 한지 체험, 농촌 체험을 하러 외부인들이 찾는다.
대청호는 시간 흐름과 함께 마을을 변화시켰다. 그동안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 이도, 다른 지역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도 있다. 환경의 변화에 처음엔 어쩔 줄 모르던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제자리를 잡아간다.
어둠이 내린 벌랏한지마을은 고요하다. 맑은 기운이 가득한 마을에 유난이 별이 많고 또 밝다.

 


<17구간>

 

- 사향탑
사라진 고향을 가슴에 새긴 비석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소전길 소전교 삼거리에서 시작해 다시 소전교 삼거리로 돌아오는 17구간 길. 다리를 건너 적막한 나무 그늘을 따라 걷다 ‘사향탑(思鄕塔)’을 만났다.
“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내 고향! 서로를 귀히 여기고 언제나 정성을 다하여 정을 나누었던 내 고향 벌말이여! 정답게 어울어 살아온 삶의 쉼터! 포근한 어버이 품속 같아라. 아! 이곳에 잊지 못할 동심이 있었으니 꿈엔들 어이 잊으리오. 국가 백년대계의 사업으로 대청댐이 완공되니 때는 1979년. 당시의 가구 수는 100여 호 인구는 700여 명 문닾뜰, 노개뜰, 느저울뜰, 기름진 옥토를 경작했으며 동쪽으로는 뒷골 남쪽으로는 독골, 서쪽으로는 우리가 가장 정이 깊었던 금강물과 나루터 하얀 백사장이 있었네.” - 비문 中 -
사향탑 뒤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벌말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새겼다. 사향탑에서 조금 내려가다 보면 입구에 귀여운 솟대가 죽 늘어선 충북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 탄
17구간
현마을이 있다. 벼 베기가 한창인 최성근 씨 부부 역시 고향 벌말을 잊지 못한다.
“벌말이 물에 잠기기 전에 여기는 논 취급도 안 했던 데야. 발이 푹푹 빠지고, 여기서 농사지을라믄 고되지. 벌말은 얼마나 좋은 땅이 많았다고. 옛날엔 문의면 소재지보다도 컸어. 나도 고향 떠났다가 25년 만에 다시 내려왔어. 지금 이 마을에 벌말 사람은 나밖에 없어.”
비석에 남긴 이야기처럼 벌말은 100가구가 넘게 사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고향으로 다시 내려온 최성근 씨는 후곡리 탄현마을에서 다시 농사를 짓는다.

 


- 청원 이강영당
대청댐 공사로 옮겨온 영당

 

 

다섯 가구가 산다는 탄현마을에서는 최성근 씨 부부 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산기슭에 한옥 기와가 보인다. 한옥은 바로 아래에 있는 집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집에도 한옥에도 사람이 없었다. 최성근 씨는 그곳이 청원 이강영당이라고 한다. 연안 이씨 이광정과 이만원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운 영당으로 1930년, 후곡마을에 세웠다. 이것 역시 대청댐 공사로 1980년 탄현마을로 옮겼다.
“지금은 후손들이 대전으로 영정을 다 모시고 갔다던데. 이강영당이 문화재 등록은 안 돼 있는데, 군에서 보수는 해줘.”
청원군청에서는 “이강영당은 비지정 문화재이기 때문에 군에서 관리하지 않고, 개인이 관리합니다. 군에서는 보수가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에 보수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영당까지 구경하니 작은 마을은 모두 돌아본 것 같다. 마을을 둘러보고 나가려다 최성근 씨에게 마을 입구에 있는 솟대를 물었다.
“내가 세웠어!”
소나무로 직접 만든 솟대를 보니 탄현도 벌말처럼 조금씩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 놓인 솟대가 고요한 땅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 옛 도로가 고요한 산책길로
곡계고개 우람한 상수리나무 마주하고

 

후곡리 탄현마을에서 버스가 다니는 길로 걸으면 오른쪽에 대청호를 둔다. 길 아래로 드문드문 집 몇 채가 모여 작은 마을을 만든다. 옛 마을이 물에 잠기기 전에는 그냥 산비탈 거친 밭이었을 곳에 집이 들어앉은 꼴이다.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낯선 풍경인데 물과 산과 나무와 바람, 햇볕 등이 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얼마쯤 걷다 후곡리 버스 종점 즈음에 다다르면 지금과는 다른 길이 새롭게 펼쳐진다. 옛날 가호리 주민이 이용한 도로다. 대청댐 수몰로 주민이 모두 이주하면서 사용하지 않아 다시 산책로로 조성한 길이다. 수풀이 우거진 길은 평화롭고 고요하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아름다운 그 길을 따라 걸으면 17구간의 반환점 구실을 하는 곡계고개에 다다른다. 수몰 전에는 가여울 마을과 곡계 마을 간의 유일한 통로였다. 보호수로 지정한 우람한 상수리나무가 자라고 고개를 넘나들던 주민이 하나씩 쌓았을 돌무더기와 동복 오씨 비각을 마주한다.
여기서 나즈막한 산길로 접어들어 오른쪽으로 대청호를 두고 걸으면 사향비를 통해 여행을 시작한 소전교에 닿는다. 이 구간은 길쭉하게 반환점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구간으로 어느 쪽을 먼저 가든 상관없다.

 

 


<18구간>

 

- 담배창고·청원 월리사 대웅전
미루나무 길 지나 만나는 선물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소전마을을 빠져나와 걷는 길에서 단연 아름다운 것은 죽 뻗은 미루나무다. 키가 큰 미루나무가 짙은 그늘을 만들어 뜨거운 햇살을 가려준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에서 쉼표를 찍을 수 있다. 짙은 그늘을 지났는데, 독특한 형태의 집이 있어 발길을 멈춘다. 대청호를 바라보며 솟은 언덕 위에 담배창고가 눈에 띈다. 배오개 마을에서 찾던 담배창고를 이곳에서 찾았다. 누군가 아직도 사용하는 듯한 흔적은 보이는데 사람이 없었다. 17세기 초 우리나라에 들어온 담배는 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농사짓기가 매우 버거웠다. 잎을 따서 한 곳에 모아 잎을 말리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점차 담배농사 짓는 마을이 많아지자 마을마다 창고를 지어 담배를 말렸다. 요즘은 담배 말리는 것에도 기술이 생기고 담배농사 짓는 사람이 줄면서 담배창고가 쓸모 없어져 대부분 허물었다. 길에서 발견한 담배창고는 쓰지 않는 물건을 두는 창고로 활용하는 듯했다.
담배창고가 있는 외딴집 아래로는 산비탈 밭과 대청호 풍광이 이어진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월리사 입구다. 오래된 표지석과 세운 지 얼마 안 된 듯한 표지석이 나란히 손님을 맞는다. 월리사는 신라 무열왕 때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절이 높아 달에 가까워 월리사라는 이름을 썼다는 이야기, 절 아래 있던 월동사라는 절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 등 이름에 관한 유래 몇 가지가 있다. 청원 월리사 대웅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은 조선 시대에 건립하고, 1970년에 보수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정사각형 모양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하는 소녀가 떠오른다.

 


- 마동창작마을
폐교에 불어넣은 예술의 향기

 

마동창작마을은 대청호 오백리길에서 선택 코스다. 이 마을은 대청호를 바라보기엔 멀리 떨어졌다. 염티리에서 긴 골짜기를 타고 더 들어가야 한다. 그곳 마동리 마쟁이 마을에 마동창작마을이 있다. 마을은 전형적인 남향 마을로 햇볕이 잘 들어 한없이 포근하다.
그 깊은 골짜기 끝, 고요한 마을에 창작마을을 조성한 것은 이홍원이라는 작가다. 1992년 문을 닫은 회서분교에 이홍원 작가가 들어와 작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마동창작마을 안에는 작품을 걸어 놓은 갤러리와 카페도 있다. 카페는 누구나 와서 차를 마시고 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돈이 있으면 내고 가고, 없으면 그냥 가도 좋다는 문구도 함께 쓰여 있다. 구석진 마을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는 것 같다.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무심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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