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도 출렁이는 물결이 있다
밀물이 있고 썰물이 있다
수만 개 햇살의 꽃잎을 반짝이며
배를 밀어 보내는 아침바다가 있고
저녁이면 바닥이 다 드러난 채 쓰러져
누워 있는 질척한 뻘흙과 갯벌이 있다
한 마장쯤 되는 고요를 수평선까지 밀고 가는
청안한 호심이 있고
제 안에서 제 기슭을 때리는 파도에
어쩌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래성이 있다
내 안에 야속한 파도가 있다
파도를 잠재우려고
바다를 다 퍼낼 수도 없어**
망연히 바라보는 밀물 들고 썰물 지는 바다
갯비린내 가득한 바다가
순천만으로 가는 863번 지방도로...
이 길은 늘 한산하다. 길의 끝에 ‘여수’라는 이름의 꽤 아름다운 항구 도시가 자리하고 있지만 여수로 가는 여행객과 화물을 실은 차들은 메인 로드인 17번 국도를 이용하게
마련이다 봄 내내 산수유와 매화꽃이 피고, 그 꽃들이 채 지기도 전에 살구꽃과 유채꽃이
피고, 다시 그 꽃들이 질 무렵이면 수수꽃다리와 자운영 꽃이 길과 밭 언덕을 덮는다
그리고 지금 피어나는 산괴불주머니와 씀바귀, 찔레꽃… 길을 따라 걷다가 잠시
풀섶의 꽃들에게 눈길을 주다 보면 필경은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삶의 순간 순간 속에 자신이 아껴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은 참으로 행복한 일일 것이다
터벅터벅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자신이 지나온 욕망 많았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기도 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시간들에 대해 잠시
허리를 굽혀 미안함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봄날 지천으로 꽃 핀 길을 따라 걸으며
자욱한 들꽃 향기에 취하는 사람은 강남 어딘가에 아파트를 사서 다른 이에게 비싼 값으로
되팔 엉뚱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나라의 땅속 깊이 스며 있는 석유 같은
것을 빼앗을 궁리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난 땅 주위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 꽃들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는 것을 하염없이 지켜보다가,
천천히 일어나 다시 길을 갈 수 있는 시간이 863번 도로 주위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내가 이 길을 많이 사랑하는 이유는 이 길의 주위에 피어나는 꽃들 때문만은 아니다 꽃이 핀 풀숲을 건너 조금만 멀리 시선을 돌리면 그곳에 푸른 바다가 이어져 있다
섬들과 육지에 둘러싸인 바다는 산비탈 조금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자체가 거대한
한 송이 푸른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닷가 곳곳에 자리한 포구 마을들은 언뜻 그 꽃의
내부에 자리한 꽃술의 모습을 닮아 있다 해가 질 무렵, 포구 마을에 하나씩 불이 켜지기
시작하면 작은 파도소리에 묻힌 그 불빛은 여느 들꽃의 꽃가루처럼 언덕과 산 위를 날아
문득 하늘의 별들까지 날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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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해를 받아 따뜻한 마을, 와온..
나는 걸음을 천천히 한 포구 마을로 옮긴다. 와온, 이 작은 갯마을에 들어설 때 내 마음은 늘 뛴다 4년 전 겨울, 온 세계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들썩이고 있을 때 남해안을 여행하다 우연히 이 마을에 들렀었다. 지도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작은 마을. 이정표에
적힌 한자의 의미가 가슴에 닿아 왔다
와온(臥溫), 따뜻하게 누워 있는 바다. 그랬다 마을 앞에 펼쳐진 개펄은 한없이 넓고 아늑
했다 그 바다 앞에 걸망을 맨 한 여행자가 서 있었다 누군들 삶에 지치고 자신이 꿈꾸던
것에 절망하지 않은 시간들이 없을 것인가 여행자가 천천히 개펄을 따라 바닷가를 걸을
때 한 무리의 아낙들이 공동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낙들 곁에는 몇 개의 통나무가 모닥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낙들은 굴을 까는 중이었다 여행자가 모닥불 곁에 쭈그려 앉자 한 아낙이 금방 깐
싱싱한 굴 한 점을 여행자의 입에 넣어 주었다 한없이 싱싱하고, 한없이 따뜻했던
그 굴 맛을 여행자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일이 끝나고 아낙들이 소주 한잔에 안주 삼아 라면을 끓일 때까지 염치 좋게도 여행자는 그 자리에서 눌러앉아 있었다 그때 해가 졌다 온 하늘이, 온 바다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아낙네들도, 여행자도 수평선을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지는 해가 떠오르는 해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여행자는 처음 했다 떠오르는 해는
희망과 용기, 순수함과 꿈으로 이루어진 보기 좋은 열정의 덩어리일 터였다
쓸쓸함과 연민, 회의와 같은 어두운 단어들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지는 해는 그 반대였다
연민과 부끄러움의 강한 냄새가 지는 해의 몸 전체에서 풍겨 나왔던 것이다
상실과 상심, 허무의 그림자들, 일렁이는 수평선 언저리에서 강한 인간의 냄새가 스며
나왔다
그때 여행자는 새로운 세기에도 자신이 글을 계속 쓸 수 있음을,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여전히 걸을 수 있을 거라는 강한 암시를 받았다 와온, 그곳은 여행자에게 재생의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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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포구기행] 중에서..
[와온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광양IC로 나가 2번 국도를 타고 순천방향으로 직진->광양교 지나
덕례 3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863번도로... 이후 와온해변이 나올 때까지
863번도로로 계속 달리면 된다
♬ Georges Moustaki - Le temps de vi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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