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주천강
과연 신선 맞을 만하구나! | |||||||||||||||||||||||||||||||||||||||||||||||||||||||||||||
찐빵으로 유명한 황둔을 지나면 얼마 가지 않아 주천에 이른다. 주천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것이 주천의 명물 섶다리다. 섶다리는 물에 강한 물 버드나무를 새 다리 모양으로 박고 그 위에 소나무와 참나무를 얹어 골격을 만든 후 그 위에 솔가지로 얽어 흙으로 다져 만든다. 못 하나 박지 않고 만들긴 하나 황소가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
주천강은 횡성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주천면을 휘돌아, 서면 신천리에서 평창강과 합류하여 서강이 되고 영월에 이르러 동강과 합류하여 남한강이 된다. 주천강은 상류에 속해 주천강변의 풍광이 수려하다. 이런 풍광을 배경으로 자리한 것이 무릉리 마애여래좌상과 요선정으로 주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상체에 비해 앉아 있는 하체의 무릎 폭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체의 길이도 너무 길어 신체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다. 게다가 하체의 무릎 폭에 맞추어 발을 표현하다 보니 발이 지나치게 크게 보여 발가락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이 마애불 옆에 있는 요선정(邀僊亭)은 조선 중기 풍류가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자를 새긴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양사언이 누구인가? 그는 해서와 초서에 능해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함흥, 평창, 강릉, 회양, 안변, 철원 등 강원 지방의 여덟 고을에서 수령을 지내면서 경치가 수려한 곳이면 그의 필적을 남기곤 했다.
강릉 부사로 부임하면서 봉평 팔석정이라는 곳에도 여지없이 그의 필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는 풍광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지 않았나 싶다. 팔석정이라는 곳이 언뜻 보기에는 그리 빼어난 경치가 아닌 것처럼 보이나 가까이 가서 보면 볼수록 마음을 사로잡는 멋이 있다.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거주하는 요선계 계원들이 중심이 되어 1915년에 건립했다. 주천강 상류인 이곳은 풍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19대 임금인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어 의미가 깊다.
원래 어제시는 숙종이 직접 하사하여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했던 청허루에 봉안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는 붕괴되고 숙종의 어제시 현판은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소유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했고 이를 봉안하기 위해 요선정을 건립했다.
전통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의 노력의 산물인 섶다리와 법흥사를 향하여 무릉리로 가는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삼층석탑의 모습을 보면 주천의 힘이 느껴진다. 비록 산골 마을이라 한다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고장이다. 이 탑은 예전에 험한 길을 걸어 법흥사를 찾아온 신도들을 안내하는 석탑이라고만 알려져 있고 그 유래를 알 수 없지만 이 탑 하나만으로도 주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법흥사는 통일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의 중심 도량인 흥령선원지의 옛터이다. 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했으며 도윤국사와 징효국사 때 크게 산문이 번성했다. 그러나 진성여왕 4년(891년) 병화로 소실되었고 고려 혜종 1년(944년)에 중건했으나 그 뒤 또 다시 소실된 채 천년 가까이 그 명맥만 이어 오다가 1902년 법흥사로 개칭됐다. 이곳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징효대사보인탑비, 징효대사부도, 법흥사부도, 법흥사석분 등이 있다.
요새 새로 지은 원음루를 지나면 왼쪽으로 고풍스런 극락전이 있고 극락전 오른쪽 뒤편에 징효대사부도와 부도비가 양지 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 징효대사는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파를 연 칠감선사 도윤의 제자로 흥녕사에서 선문의 법문을 크게 일으켰던 분이다.
쭉쭉 뻗은 소나무 길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선원이 있고 오른쪽 언덕길을 올라 돌면 연화봉을 배경으로 적멸보궁이 서 있다. 멀리 보이던 연화봉은 적멸보궁 가는 길에 모습을 감추었다 나타냈다 두어 차례하고 나서 적멸보궁 앞에선 그 모습을 훤히 드러낸다.
돌방 벽은 10단까지 쌓아 한장의 돌로 덮었다. 돌방 안의 크기는 높이 160cm, 깊이 150cm, 너비 190cm 정도이다. 지금은 화강암으로 단을 쌓아 들어갈 수 없다. 토굴 옆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모셔 올 때 사리를 넣고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이 남아 있다.
돌아가는 길에 무릉리에 이르니 아까 보았던 삼층석탑이 다시 보였다. 법흥사에서 나와 배웅이라도 하듯 반갑게 인사한다. 법흥사에 석탑이 없는 연유가 여기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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