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친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멀고 귀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 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 나오며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 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나희덕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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