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숙 [양수리 가는 길]
강 사이에 두 개의 길이 흐른다. 저 멀리 강원도에서부터 오래도록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흐르지 않는 듯이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북한강, 그리고
그 사이로 굽이굽이 뻗어가는 두 개의 길.
사람들은 그 두 개의 길을 합쳐 마음 편하게 ‘양수리 가는 길’이라고 부른다.
양수리 가는 길에 무엇이 있는가. 소설가 김인숙은 그 길 속에서 마침내 ‘물안개’를 찾아내고, 거기에 망설임 없이 제목을 붙인다.
<양수리 가는 길>이라고.
그러므로 소설 <양수리 가는 길>을 읽는 것은 물안개의 의미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안개, 그것은 곧 물안개라는 이름의 환상과 같고, 우리는 거기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은 지 오래 됐다. 환상적인 사랑이라고 이름하면 더욱 좋을, 그런 물안개.
김인숙의 <양수리 가는 길>은 그러나 환상적인 사랑의 물안개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양수리 가는 길>에는 한 남자가 여행길에 나섰다가 문득 졸음에서 깨어났을 때 눈에 잡혀들었던 물안개의 모습을 내내 그리워하는 마음속 풍경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의 물안개는 한 인간에게 다가온 안개, 즉 장애물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 한 남자는 지금 면허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는 아내를 기다리는 중이다. 면허 시험에 합격하면 자동차를 아내에게 넘겨주어야 할 입장에 있는 그는,
자신의 자동차를 몰고 양수리에 가고 싶은 희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절망스러워한다.
그리고 2, 3 개월 후에는 동남아의 오지로 3 년 동안 파견 근무를 나가도록 발령받은 사실을 아내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해외 근무가 선호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거니와 그가 발령받은 곳은 천장에 도마뱀이 기어다니고, 고깃간에는 냉장고조차 없고, 용변 뒤에
휴지를 쓰지 않는 나라이며 그곳에서 10 개월 동안 근무했던 동료가 걸레조각처럼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귀국한 ‘사람 못 살’ 나라인 것이다.
아내는 결국 첫번째 면허 시험에서 보란 듯이 합격을 하고, 그는 끝내 양수리로 드라이브를 가지 못하게 됐음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그에게 흘러가는 풍경은 꿈이 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인천의 월미도를 향한다. 양수리와는 반대의 길, 그 길을 가는 내내 아내와 살림을 차리고, 결혼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꿈 대신 부를 키워나가기 위해 안달복달하던 삶의 편린들이 끼어든다. 살아가는 일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하지는 않았던 시절들이.
월미도에 도착해 맥주 한 잔을 마시던 그는 외국으로 혼자 파견나간 후 아내에게 ‘나 외국에 파견나와 있다’고 뒤늦게 고백하는 상상과 지금 눈앞에서 면허 시험에 합격한 아내가 애교를 떠는 현실 속에 뒤섞인다.
이 현실은 매우 괴로운 것이다.
그 괴로운 현실 속에는 ‘맨날 양수리 타령을 했으니 그곳으로 드라이브시켜 주겠다’는 아내의 인심쓰는 듯한 목소리도 들어 있다. 하지만 그는 결연하게 한 인식을 받아들인다. 늘 가고자 했으나 이제는 결코 양수리에 갈 수 없을 것임을. 양수리를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현실을.
양수리 가는 길은, 그렇다. 앞서 얘기했듯이 물안개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동시에 물안개의 낭만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길이기도 하다.
북한강은 여전히 넓고 깊게, 멈춘 듯이 흘러가지만 양수대교를 건너기 전의 조안면 쪽 길과 양수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꺾어지는 서종면 쪽 길 어느 곳에서도 이제는 순수한 흙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요란한 풍경과 낯선 조어造語들로 이루어진 호텔 간판들과 수상 스키를 타는 선남선녀들의 모습 속에서 자본주의의 힘으로만 가능한 낭만을 볼 뿐이다.자본주의란, 특히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의 힘이란 얼마나 힘이 센가.
그래도 서종면으로 꺾어들어 청평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호젓함이 많이 남아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흙냄새 풀풀 이는 신작로 길을 벗할 수 있었지만 그 길조차 아스팔트로 포장된 것은 도리없는 아쉬움으로 접어야 할 일.
강둑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과 애인의 손처럼 작은 찻집의 간판들과 물비늘의 눈부심 같은 것이 아직은 ‘양수리 가는 길’의 희망을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양수리를 배회할 때, 소설 속의 그가 ‘양수리 가는 길’의 희망을 못 이루고 마음속에서만 양수리를 안고 있는 것은 반쪽의 행복과 반쪽의 불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 양수리는 소설 속의 그가 꿈많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내가 왜 이렇게 왜소해졌는가’라고 곱씹는 샐러리맨의 아픔을 달래기에 좋은 곳이며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 저녁 석양빛이 강을 비출 때 연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어지는 곳이다. 꿈많던 시절의 순수함을 망각한 채, 근처의 러브 호텔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왜 꿈을 말하지 않는가.
김인숙의 소설들은 많은 부분 현실의 삶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을 뒤집어 보면 꿈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양수리에는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은 상태로 ‘양수리, 양수리’라고 말하다 끝내 양수리에 가는 꿈을 포기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을 맺었을 것이다.
양수리에 가지 않더라도 매일 밤 양수리에 가는 것과 다름없는, 그럼으로써 마음속의 물안개를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라는 화두를 떨어뜨렸다는 뜻이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는 김인숙의 소설 속에 ‘양수리에 가는 희망을 품고 살라’는 메시지도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버드나무 숲길을 걸으며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 수상스키를 타던 청년이 스키에서 미끄러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식도락가들이 고급 차를 몰고와 강변의 정취에 취해가는 모습을 보는 일, 이 모든 눈길에 ‘이곳에는 안식이 있다’는 한줌의 평화를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넉넉한 물줄기의 흐름이다.
강은 강이되 바람의 힘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진중함이 두 개의 길 사이로 흐르는 북한강 고유의 멋스러움이다.
<양수리 가는 길>에는 ‘그’의 말 그대로 양수리로 가는 지도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지도를 들고 있다 해도 마음속에 양수리에 대한 꿈이 없다면 우리는 끝내 양수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몸뚱이는 양수리에 가 있어도 그 몸뚱이를 지탱하는 머릿속에 물안개를 피워올리는 추억이 없고, 현실을 이겨나갈 지혜가 없으면 양수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양수리 가는 길, 그 길 위에 물안개가 핀다.
두물머리 아침을 지키는 저 느티나무의 나이는
우리나이로 400 세라고 한다. 그는 한 세대를 건너뛰어 그곳을 지키고 있다
그곳에 갔을 때
이기철 시인의 <봄날>을 읽으며 양수리 건너편의 서종면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갔을 때는 비포장 도로가 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양수리 가는 길>을
읽으며 다시 그 길을 달릴 때는 황토빛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대신 호사스런 찻집과 고깃집이 죽 늘어서서 드라이브에 나선 청춘들의 입맛을 채워주기에 급급할 뿐이다. 이것이 세월인가 싶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추억을 낳는 길이 아니라 추억을 만드는 길로 변하는 것.
그래서일까. <양수리 가는 길>을 읽으면서, 해외로 나가게 되는 작중의 남편이 끝내 양수리로 가지 않고 인천으로 방향을 잡는 줄거리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소설적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그러나 양수리는 여전히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 있어야 할 길인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여전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도심 어느 구석에 물안개 피어오르는 곳이 있는가.
<양수리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부러운 눈길을 받는 계층이 화이트 칼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학물 먹고, 떠르르한 직장에
취직해서 잘나가는 듯이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는 이 땅의 화이트 칼라들에게, 혹은 이 땅의 젊은 가장들에게 무슨 꿈이 남아 있는가. 그들에게 양수리에
가고자 하는 꿈이 남아 있다면 물안개를 보며 그런 반문을 되뇌어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 > 맛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봉화 백천계곡 (0) | 2005.06.15 |
---|---|
영덕 옥계계곡 (0) | 2005.06.15 |
묵호를 아는가 (0) | 2005.05.30 |
정남진...회진항(전남 장흥군) (0) | 2005.05.30 |
한드미마을(충북단양) (0) | 2005.05.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