붐비는 은행 창구,
내 곁으로 홀연히 다가온 한 할머니 천천히도 말씀하신다
총각… 내… 글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돈 뽑는 것 좀 도와주시오
저쪽서, 견본 보고 고대로 하라는데 당최 어려워서 말이오
네, 그러지요 하며 받아 든 할머니의 출금표,
성명란에 '홍길동'이라 삐뚤빼뚤 그려져 있다.
혹시나 싶어 펴 본 통장에는 '홍길동'이 아닌
묵은 장 내 나는 성함, 손때 가득 묻어 찍혀 있는데,
손주 생일이라 장난감 하나 사줘야겠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신다
어느 은행에나 나타나는 홍길동
오늘은 할머니로, 내일은 누가 되어
작은 집 담장 안으로 정 보따리 던져 주고
따뜻한 발자국 찍으면서 이 동네 저 동네 출몰할런지.
번호 호출되자 학생마냥 손 드시곤
은행 아가씨와도 손주 생일 축하하고
흐뭇하게 은행을 나가시는 할머니
할머니, 손주 기다리는 집으로 가신다
축지법도 쓰지 않고
보따리로 변할 오천 원 한 장 꼭 쥐시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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