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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명자꽃

by 류.. 2007. 3. 29.

 


벚꽃처럼 너무 화사하지도, 모란처럼 너무 요염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촌스럽지도 않은 꽃이
바로 명자꽃이다  한마디로 적당히 곱고 향기로운 꽃이다 그래서 경기도 일부에서는 아가씨꽃나무
라고도 하며, 옛 사람들은 이 꽃을 보면 여자가 바람난다고 하여 집안에 심지 못하게 했다

모과의 꽃과 비슷하면서 또 모과처럼 향기가 좋아 술을 담그면 그 맛이 일품이다
명자나무의 또 다른 이름은 산당화(山棠花)이다
꽃은 단성으로서 4월에서 5월까지 잎과 함께 진한 분홍색 꽃이 핀다
열매는 처음에는 초록빛의 타원형 이과가 8월이 되면서 노랗게 익는다



      그해 봄 우리 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初經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린 까닭이었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보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樂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紅燈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만 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自盡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 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의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안도현, '명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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