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류.. 2008. 9. 5. 13:07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